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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기병(第二次 起兵)과 최후(最後)의 항쟁(抗爭)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군이 무장해제 당하자 전봉준 등은 나라아 위기에 처햇음을 직감하고 '다시 기병하자'는 격문을 각 지역의 농민군에게 보냈다. 수만 명의 농민군이 삼례 뜰에 몰려들었고 최시영을 위시로 한 충청도 북접도인들도 합류하기로 결의되자 삼례에 모인 농민군은 후방을 수비하는 총력전의 형태를 갖추었다. 더욱이 경기.강원.경상.황해도 등지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함으로써 조선 전역은 농민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다. 전봉준 등이 이끄는 농민군이 서울로 북상한다는 소식을 접한 정부는 9월 20일 이두황.성하영을 보내 진압하도록 하고, 10월에는 일본군과 이규태 부대가 남하해 결국 농민연합군과 정부.일본연합군의 대회전이 공주에서 벌어졌다. 농민군은 공주를 함락하려고 10월 23일부터 이틀간 이인,효포,능치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실패해 논산으로 후퇴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농민군은 11월 8일부터 나흘동안 40여 차례의 공방전을 거듭하였지만 수천 명의 농민군 희생에도 불구하고 공주성 장악에 실패하였다. 수만에 이르는 농민군은 2700여명에 불과한 정부.일본연합군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