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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琫準 將軍 皮逮 遺蹟碑(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비) 전봉준 장군은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농민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갑오년 3월 창의문이 선포되고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함성은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외세의 개입으로 전봉준 장군과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퇴하였고, 11월 정읍 입암산성으로 몸을 숨긴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전봉준 장군은 백양사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 김개남장군을 만나기 위해 이곳 피노리에 피신중 당시 고부군 달천면 달천리(현 정읍시 덕천면)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일본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12월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 장군은 이듬해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장군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새로운 역사를 열고자 했던 혁명의 중심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항거한 전봉준 장군의 뜻을 기리고자 삼가 비를 세운다. 서기 2005년 5월 4일 순창군수 강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