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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3월31일 토요일 2 (제135호) 기 획 신라에서는912년에서 927년에 이르는 약 15년간 金姓대신 朴姓을 가진 세 왕-신덕왕, 경명왕, 경애왕-들이 잇따라 즉위 했다.그 세 박씨 왕 가운데 마지막 임금 경애왕은 불과 재위 4 년을 넘기지 못한 채 죽었다.그리고 왕위는 다시 김씨로 넘어 갔다. 븮삼국사기븯에 의하면 927년 음력 11월 경애왕은 포석정 에서 향연을 베풀며 취흥을 돋우다가, 견훤에게 사로잡혀 비 운의 죽음을 맞이했고 뒤를 이어 김부가 즉위했다. 이를테면 치명적 자만의 결과 죽음을 맞이한 기록만이 남아 있는 셈이 다. 따라서 그를 둘러싼 평가 또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일 수밖 에 없었다.그 각인 탓에 지금껏 경애왕은 하대의 정치 상황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검토된 바 있을 뿐, 본격적으 로논구된바조차없었다. 후삼국 시대란 후고구려, 후백제, 하대 신라로 이어지는 삼 각 구도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 시기를 연구하는 논자들은 궁예-왕건이라는 한 축과,견훤이라는 한 축을 양립시켜 당대 를 조 감 했 을 뿐 신 라 의 정 치 적 역 할 이 나 노 력 에 는 상 대 적 으 로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왔다. 기왕에 외면해 왔었던 신라를 염두에 두고, 치열한 생존 욕구와 노력들을 하나하나 고스란히 포착할 때,또 이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볼 때에야 말로, 마침내 역사의 단면에 감추어져 있는 리얼리티에 한발 더다가서게되리라믿어진다. 후삼국동란의시간과공간에서경애왕이 겪은포석정의비 극은 되새겨볼 여러 의문을 남긴다. 만일 경애왕이 포석정에 서 견훤에게 사로잡혀 죽게 된 이유가, 상식처럼 굳어진 주색 에 빠져 있은 결과라면,견훤은 방종에 빠진 임금을 살려 두어 괴뢰 정권의 꼭두각시로 활용하지 섣불리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을것이다. 경애왕은수차례에걸쳐왕건에게견훤에 대한강경책을주 문하기도 했고 심지어 927년 정월 군사 동맹의 선두에서 견훤 을 공격한 전력도 있었다. 경애왕의 주창 하에 맺어진 고려와 신라의 공조는 급기야 927년 정월에서 11월에 걸쳐 견훤에 대 한파상적공세의바탕이되기도했다. 하지만 후삼국 시대는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방 편으로 삼는 난세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리를 위해 집산과 배신, 식언, 협잡이 반복, 난무했고 첩보와 정탐이 전, 후방을 불문하고 만연, 일상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젠 역사의 이면 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러나 역사에 결코 만만치 않은 흔적을 남긴 익명의 존재와 과정들을 더 이상 묻어두거나 외면해선 안 된다. 또 복잡다단한 이 시대를 이해함에 있어, 전단계로 이분법,혹은 삼분법의 조악한 틀,예컨대 왕건은 선인(善人), 견훤은 악인(惡人), 경애왕은 폐인(廢人)이란 편견을 은연중 깔고, 이 선상에서 당시를 조감하는 한 핍진(逼眞)한 결과를 얻어낼수없다. 왕건과견훤에대해가져온,일체의편견이나우상을벗어야 하며, 오직 실리와 시세를 쫓는 현실적 인간만이 존재했고, 모 든것의이면에불확정성만이존재한다고전제할때당시현실 은 제대로 파악될 것이라 믿어진다.927년 이전만 놓고 보더라 도 왕건과 경애왕 사이에도 동맹과 단절이 반복되었다는 느낌 을 도시 지울 수 없다. 적어도 이 시기 정치, 사회에 국한할 경 우,모든 정치 세력의 성향은 시간의 진행과 함께 변화하며,따 라서항상성을가진다고볼수도없다. 모든현상의이면에는불확정성이존재하고있으며,하나의 일관된 통시성(通時性)마저도 찾을 수 없다. 가령 왕건을 예 로 들더라도 시종 친신라 노선만을 고집한 인물로 보기 어렵 거니와,외려 왕건이 신라 병합을 꿈꾼 점에서는 궁예,견훤과 의 차별성이 거의 없다. 신라와 고려와의 동맹 역시 파편적, 단절적 수준을 넘지 못했다. 경애왕 역시 친왕건의 노선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며, 설사 친왕건의 노선을 고집했던 순간에 조차 동맹자적 입장에서의 왕건과의 제휴나 연대가 아닌, 다 만이이제이의노선과기조였을뿐이다. 박씨 정권 하에서 시중을 역임했던 김유렴은 경애왕 즉위 이후 관직을 잃자 과거를 버리고 박씨 정권 타도와 김부,견훤 의 앞잡이 역할을 기꺼이 했고, 또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했을 때는 친왕건의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김부는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을 만큼 친백제 노선을 견지했던 인물이었으되, 뒤 에는 견훤을 버리고 왕건에게 자진 귀부했다. 시간의 축 위에 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연속되지 않으며, 이어지는 항상성을 찾을 길은 없다. 따라서 왕건과 경애왕의 동맹조차 끈끈한 것 이 아니라, 자국의 실리를 위해 취한 정치적 임기응변의 하나 였다. 경애왕의 마지막 순간 왕건이 적극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것도이런맥락에서만제대로이해될것이다. 경애왕은 924년 8월(9월) 형 경명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927년 11월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만 3년 정도 재위했 다.그의 재위 시기는 밖으로 왕건과 견훤의 각축과 휴전이 반 복된 시기였고, 안으로 거듭된 박씨 왕의 등장에 김씨 왕족들 의내부불만이팽배했을때이기도했다. 924년 8월 형 경명왕이 죽자 동복아우 위응이 왕위에 올랐 다. 위응은 경명왕 2년(917년) 상대등이 되었고 동왕 4년(920 년) 각찬 김성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동왕 8년(924년) 8월까지 4년간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위응은 924년 9 월 즉위하고 있다. 이 사실을 주목한다면, 상대등에서 물러난 이후부터는 유사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고 봐 야한다.그경우위응은태자의위에있었을가능성이크다. 경애왕은 924년 2월 19일 황룡사에서 일련의 행사를 벌인 것으로 나타난다. 경명왕의 사망은 924년 8월이었고, 경애왕 이 왕위에 올라 업무를 행한 것은 9월이었다(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원년조). 그렇다면 황룡사 행사가 있은 2 월 19일은 위응이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위응이 행사를 주관했고, 기록에 왕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시간의 착간이라 볼 수 있으나, 구체적 날짜까지 언급되고 있 다. 진흥왕대로부터 경문븡헌강븡정강븡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 백좌강회가 개최된 선례는 많다.그럼에도 923년 위응이 주관 한 백좌 강회를‘백좌를 세운 선교의 시초였다’라 밝힌 것은 그 자체로 이전과는 다른 뚜렷한 질적븡양적 차이가 있었음을 시 사한다. 그렇다면 위응은 경명왕 7년(923년) 2월 무렵 사실상 의왕권대행자였음을시사한다. 미증유의 백좌 강회를 왕이 아닌 위응이 주관했다는 점 자 체는 이로써 이해될 수 있다.이는 왕위에 오르기 직전 위응이 태자의 신분으로 일련의 행사를 주관했음을 보여 준다(이와 비슷한 사례로 덕만의 대리청정을 들 수 있다. 당시 공주였던 덕만이 왕으로 나타난 사실은 副王的 존재로서 일정 정무를 대리한 정황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박순교, 븮김춘추의집권과 정연구븯,경북대박사학위논문,1999). 위응이황룡사로행차한까닭은경문왕을중시조로한김씨 왕실과의 특별한 인연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924년 2월 19일 위응이 황룡사에 백좌(百座)를 설치하고 강설(說經)을 하며 겸하여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친히 행향(行 香)을 하고 불공을 드려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의 단 초를 열었던 사실은 종래 김씨 왕실의 전통을 확대븡계승한 것 으로 정치 세력의 포괄적 융합을 다분히 염두에 둔 조치였다. 위응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 이 행사를 주관했다는 것은 자신 의즉위를위한사전정지작업이란말과같다.곧위응은김성 세력의 반발을 막고 자신의 즉위를 위해 가장 강력한 기존 정 책의옹호자였음을내외에천명한것이다.그리고결과적으로 위응이 즉위한 것에서 이 조치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고짐작된다. 경 애 왕 은 왕 위 에 오 른 지 두 달 이 지 난 원 년 1 0 월 신 궁 에 직 접 제사했다. 신궁 친제는 경문왕 12년 2월 이후 52년만의 일 이었다. 종래 경문왕을 중시조로 한 김씨 왕실에서도 이는 보 이지 않는다. 따라서 경애왕의 신궁 친제는 경문왕 이래 단절 된 전통을 잇는 상징적 조치이자, 김성 왕통의 충실한 계승자 임을 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또 전국적인 대사령을 내렸는 데 이는 박씨 왕권에 저항한 종래 제 세력의 포용 조치였다고 믿어진다.효공왕 원년(897년)대사면과 백관의 벼슬을1급씩 올려주는 조치가 있었다. 이로 미루어 경애왕의 조치는 시간 적으로 볼 때 신덕왕 이래 박씨 정권에 반발한 세력- 예컨대 경명왕 2년(918년) 일길찬 현승의 난 가담 세력 등에 대한 면 죄, 면책의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위응이 민심을 수습하고 반대 세력에 대한 포용 정책을 잇달아 제시한 것은 그만큼 정 정이불안했음을보여준다. 그러나표면적으로만본다면,위응이즉위한즈음의정국은 안팎으로 일시적 평화가 유지된 시기였다. 925년 3월 송악에 서 있은 북변의 움직임 논의에서 이는 단적으로 짐작된다. 송 악의 궁성 동쪽에서 70척 지렁이의 출몰을 두고 고려 조정은 견훤이 아닌 발해를 거론하고 있다. 븮고려사절요븯 1권 태조 8년 3월 조,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애왕2년3월조 견훤은 일찍부터 자신을 지렁이와 연결지운 바 있었다. 븮삼 국유사븯권2기이 후백제견훤조 그럼에도 지렁이의 출몰이 견훤 대 신 발해와 연결되고 있다. 이것은 고려가 관심을 북변에 두고 있었고 동시에 삼국 사이 평화가 유지되어 당분간 견훤과의 화의가지속될것이라믿었음을보여준다. 이 후삼국 평화의 조정을 가장 먼저 깨뜨린 인물은 왕건이 었다.왕건의 서경 행차는 바로 이런 움직임의 일보였다.븮고려 사절요븯 1권태조8년3월조 왕건은 북변의 혼란을 이용,발해인의 포섭과 귀부를 적극 선동했다. 실제 발해 장군들의 고려 투항 은 925년 9월에만 두 차례에 걸쳐 확인된다.왕건은 귀부의 방 법을 남방에도 확대, 적용해 세력 강화를 꾀했다. 9월 19일 매 조성(買曹城)의 장군 능현(能玄)의 귀부가 대표적이다. 븮고려 사절요븯1권태조8년9월조,븮고려사븯권1세가1태조8년9월조,븮삼국사절 요븯권14경애왕2년9월조 능현이 자청해서 사인(使人,부리는 사 람)을보내항복을청했다고보긴어렵다.이것은왕건이취한 거대한 포섭정책의 일환에서 얻어진 외교 정책의 개가였다.9 25년 10월 10일 영천의 수장 능문이 시랑(侍郞)배근(盃近)과 대감(大監) 명재(明才) 상술(相術) 궁식(弓式) 등을 거느리 고 귀부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븮고려사절요븯 1권 태조 8년 10월 조,븮고려사븯권1세가1태조8년10월조,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애왕2년10월 조925년 10월 16일 왕건은 조물성에서 견훤과 조우하고 있다. 븮고려사븯권1세가1태조 8년 10월 을해조 925년 10월 경 왕건은 경북 북부에진주하고있었음이짐작된다.그는견훤과의전면전에 앞서 주변 지역에 대한 대대적 포섭책을 구사했다. 이때 벽진 군이총언의귀부도있었을개연성이크다.왕건은이총언의1 8세 아들 영(永)을 대광 사도귀의 딸과 결혼시키고 방읍의 정 호 229를 주고 충주, 원주, 광주, 죽주, 제주의 창곡 2천2백석 과 석염 1천7백8십5석을 주었다. 이에 더해 찰(札)을 써 금석 (金石)의믿음을보였다. 당시 전쟁 상황에서 열세한 왕건을 택한 능문의 귀부는 영 천의 안위를 건 모험이었다. 그럴수록 능문의 귀부는 왕건의 적극적 포섭의 결과였다. 영천이 가진 지리적 중요성, 능문이 왕건의 각별한 믿음 아래 돌아간 사실을 종합할 때 능문에게 파격적인 조치가 취해졌다고 믿어진다. 실제 능문은 왕성을 사성(賜姓)받았다.븮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븯 이것은능문의귀부를위한왕건의노력이어떠했는지알게 한다.백제 출신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 역시 아들을 보내 귀부 했다고 하는데 대략 그 시점은 이때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이다.이모두는왕건이주도한포섭결과였다. 왕건은영천이서라벌과가깝다는점을들어 능문은돌려보 내고 그 휘하 실무자들만 가납했다. 이야말로 왕건의 복선이 깔린 행위이며 또 경애왕을 의식한,가장된 연막이다.그의 말 처럼 영천이 서라벌과 가깝다면 실무진의 귀부도 받아들여서 는 안 된다. 실무진을 받아들인 것은 정보를 확보하려는 노력 의 일단이며,동시에 그 지역 수장을 돌려보낸 것은 영천에 친 위세력을 확보해 두려는 양단책일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왕 건의 행위는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신라에 대한 명백한 반란 행위에해당한다.또동맹국의기준에서도용납될수없다. 위응이즉위할무렵이루어졌던후삼국의평화는왕건의세 력 확대에 자극받은 견훤의 공세로 불과 1년 만에 전운으로 바뀌었다.925년10월16일견훤은왕건의세력확대를저지하 고자 조물성에서 진공, 왕건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이곳은 1 년 전 견훤의 아들 수미강 등이 고려 장군 애선 등을 맞아 싸 운 곳이었고,고려군이 끝내 수성에 성공한 곳이기도 했다.견 훤이 대규모 공격에 직접 나선 것은 왕건의 포섭정책에 대한 위기의식의결과였다. 양군 사이 격렬한 전투에서 왕건이 불리했다. 북번의 날랜 용병을 거느린 유금필의 븮고려사절요븯 1권태조6년조등장 이후에 조차 왕건이 견훤을 상보라 칭하면서 존비의 예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 누가 먼저 강화를 요청했는가는 기록에 따라 다르 지만.왕건이 견훤을 상보로 칭한 점과,수성의 입장이었던 점 을 고려하면 왕건이 강화를 요청했을 가능성이 크다. 견훤 자 신의 고백처럼 그의 군세는 왕건의 그것에 비해 대략 곱절에 해당했다.븮삼국유사븯권2기이 후백제견훤조 굴욕적인 강화에 유금필이 격렬하게 반대했음이 기록에 나 타난다.븮고려사절요븯권1태조8년10월조 당시 화의를 둘러싸고 고려 진영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 자 신라 경애왕은 첩보망을 동원,이 사실을 입수했다.당시 사 정의일단은경애왕이왕건에게보낸서신에서보인다. ‘신라왕이 이 소식을 듣고’ 란 문구는 유금필의 말을 들은 직후 경애왕의 조치가 취해졌음을 보여준다. 서신의 내용은 화의 불가와 전쟁 재개 촉구였다. 삼국의 평화와 공존을 염원 했을 법한 약소국 신라 경애왕이,외려 화의 불가란 입장을 밝 힌것은주목된다. 경애왕은 왜 둘의 화의에 새삼 개입했으며,또 왜 전쟁을 원 했던 것일까. 신라의 입장에서 왕건과 견훤은 다 같은 난신적 자다. 견훤이 ‘반복하여 거짓이 많다’면, 왕건은 ‘교묘히 포섭 책을 구사, 세력을 넓혀가는’ 존재다. 견훤이 반 신라를 기치 로 세워 무력으로 신라 영토를 침탈하였다면 왕건은 존왕(尊 王의 예를 표하며 동시에 영천을 접수했다. 경애왕에게 있어 둘은 모두 ‘신라 영역을 갉아먹는 좀’같은 존재였고, 따라서 경애왕은 둘의 반란자적 성격을 동치(同値)시켜 파악하고 있 었다고믿어진다. 지금껏 왕건은 신라를 존왕(尊王)의 예로 섬긴 인물이라 인 식되어 왔다. 견훤이 ‘늑대’나 ‘범’이라면 왕건은 ‘부모’와 같 다는 세평까지 있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 5년조, 븮삼국 사절요븯권14 경순왕 5년 5월조 하지만 이는 왕건의 야누스적 측면 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아니면 애써 간과한,외려 일면 조작된 결과론적이고 불완전한 미화다. 실상 견훤을 ‘이리’나 ‘범’이라 말한 것은 신라인이 아닌 일찍이 왕건 자신의 입을 통해흘러나온표현이고지적이었다. 또 즉위 과정에서부터 왕건은 주변 제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것도 아니며, 그만큼의 덕조차 실은 갖춘 게 아니었다. 궁예 거세와 왕건의 집권 직후 접종한 환선길,임춘길 등 왕건 측근의 반혁명 사건은 왕건이 즉위하자마자 사리를 도모한 모리배에 불과한 인물로 측근에 적나라하게 비쳐졌음을 뜻한 다. ‘죄악이 가득 차 절로 쓰러지길 기다린다.’란 왕건 자신의 말처럼 그는 상대의 약점과 이완을 노려 급수를 찌르는 유형 이었으며 궁예의 거세 또한 그러했다고 여겨진다. 그가 진정 한 신하였다면 어떤 이유로든 주군에게 칼을 겨누진 않았을 것이다. 환선길 처의 말마따나 아녀자의 식견으로도 왕건은 환선길 등과 똑같으며 별반 차이가 없다는 인식이 자리했었 다. 븮고려사븯 반역열전 환선길 또 이흔암을 거세하기 위해 가장 은 밀한 아녀자의 측간까지 간자를 붙여 증거를 확보했던 사실 에서 왕건은 비정상적일 만큼 집요하며 비열했다는 잔상을 지울 길이 없다. 이 일련의 행위 븮고려사절요븯 권1 태조신성대왕 원 년조 는 그가 정적의 숙청과 거세란 목적에 직면했을 때 수단, 방법을가리지않은유형임을보여준다.까닭에폭군이라알려 진 궁예 때 후삼국 태반을 확보한 것과 달리 븮삼국사절요븯권14 경 명왕 2년 6월조 왕건 초기 고려 지경은 확대되긴 커녕 더욱 축소 되었다.관인을내세운왕건은실은관인은커녕일면매몰차고 잔인했다. 지금껏왕건은존왕의명분을실천하며친신라정책을구사 한 인물로 자언했고 “대의에 의거하여 주나라 왕실(여기서는 신라)을 높이는 일에 제환, 진문의 패업과 같은 자가 누구이겠는가? 기회를 엿보 아 한 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 망, 동 탁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일이다.中略어찌다시사직을편안히하겠는가라고생각하였다.나 는마음에악이 없고뜻이 왕실을높이기에간절하므로 장차조정을구원 하고나라를위태로움에서구하려고했는데….“〈왕건의견훤에대한 답 서〉 中 븮삼국사기븯권50 열전10 견훤조 알려졌었다. 하지만 영천 등 신라 주변 지역의 지속적 접수에서 보듯 이율배반의 행동을 자행했다.뿐더러 신라 병합의 야욕을 일찍부터 품었고,또 노 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심지어 936년 김부가 왕건에게 나 라를 들어 귀부했을 때,이에 반대한 신라인을 무력으로 요격, 학살하기까지했다.왕건은 장사치의 근지(根地)를 이었고 귀 부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거래 방식을 활용, 신라인의 적극적 항전 정신을 방해하고 유린함으로써 신라를 멸망에 이끈 장 본인이었다. 920년10월견훤이騎步兵1만을거느리고신라를침공하여 대량(大良 합천(陜川) )븡구사(仇史) 초계(草溪)의 두 고을을 빼 앗고 진례군(進禮郡)에 이른 까닭에 신라 경명왕은 9개월 전 맺은 동맹을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명왕4년정월조의식해 청 병을 요청했다. 이때 왕건은 전격적 군사 행동에 나서지 않아 견훤을 타격할 시점을 놓쳤고 븮 삼국사절요븯권14 경명왕 4년 10월조 신라의 급박한 상황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러기는커녕 성제대 타령을 늘어놓았다. 642년 김춘추가백제를가격할군사를고 구려왕에게 청했을 때 二嶺 이북을 파병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장면과 도흡사하다.성제대란 천사옥대,곧 하늘이 내린 옥대를 지칭한 다. 진평왕이 삼촌 진지왕을 축출하고 집권한 직후, 천명(天 命)을 빙자해 민심을 수습하려 만든 상징물로 븮삼국유사븯권1 기 이 천사옥대조 54년간 진평왕을 권좌에 있게 한 일종의 공고한 권력기반같은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왕건이 조심스런 질문의 형태나 관심 표 명의 선을 아예 넘어, 금시초문이라며 응수한 김율을 향해 논 박과 질책을 섞었고 거기에다 심한 모욕과 만면에 웃음까지 띠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의 오만함은 새삼 궁예에 못지않음 을 보여주며, 또 이미 340년餘가 지나 신라인의 관심과 기억 에서 아득히 사라진 성제대를 거론한 것은 신라 병합에 대한 그의 야욕을 솔직히 드러낸 일단이다. 신라 중신(重臣)도 모 르는 신라 속내를 꿰뚫고 있는 왕건의 통찰력과 집착력은 그 간 그가 신라에 대해 어떤 관점에서 추구하고 접근하려 했었 는지,그간의세월을단번에짐작하게한다. 견훤과 왕건은 신라 차지를 놓고 다투는 입장이었고, 서로 가 서로의 목적과 의도를 잘 알고 있던 터였다.패권 쟁탈에서 둘은 모두 실리를 의리보다 앞서 놓고 행동화했다. 실제 신라 병합을 처음부터 기치로 내세워 민심 수렴을 꾀한 것은 견훤 이나 궁예에 이어 왕건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왕건의 집권 과관련해신라병합이거론되는대목이다. 궁예 거세 3달 전(918년),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 원(許原) 등에 의해 왕건이 계림을 얻고 압록까지 세력을 넓 힐 거라 논해지고 있으며,게다가 송함홍 등에 의해 궁예의 흉 포한 성정이 화두로 논해진 사실은 ‘친왕건 반궁예’의 조직적 선동과움직임이암묵적으로개시되었음을보여준다.이유언 (流言)은 단순한 유언이기보다 왕건이 고려의 영광을 내세워 민심을 선동했고, 나아가 궁예를 거세하고 집권의 계기로 삼 은 일단이라 믿어진다. 왕건의 집권 직전이란 공교로운 시기, 왕건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해석과 참언이 난무했다는 것은 왕건 측이 무력 거사에 앞서 조직적인 선전 활동에 일차 나섰 음을 알게 한다. 특히 이 무렵, 계림에서 압록까지의 구획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점은 향후 신라를 밟고 후삼국을 통합하 겠다는 국정 운영의 청사진이 이미 마련되었음의 내외 선포 와같다고믿어진다. 또왕건은나이서른에달했을때9층금탑에올라가는꿈을 꾸었다고 한다. 븮고려사븯권1세가1태조원년조, 븮고려사절요븯권1태조신 성대왕원년조,븮삼국사절요븯권14경명왕2년조이 때 는 그 가 궁 예 에 게 귀부한 후 10년째가 되던 906년이었고,궁예를 제거하고 집권 하기 12년 전이다.당시 왕건은 궁예의 명에 따라 군사를 이끌 고 육지와 서븡남해,나주 일대를 경략하던 중이었다.여기서 9 층탑은 단순한 상상 속 탑이 아니라 황룡(黃龍)의 출현으로 진흥왕대 황업(皇業)의 상징으로 세워진 황룡사,그 경내 9층 탑의 실존이 아닌가, 믿어진다. 9층탑의 건립 과정은 김춘추 의 아비 김용춘과 직결되며, 나아가 김춘추의 집권으로 이어 진 권력의 토대이자 고리였다. 또 선덕왕이 인근 구한(九韓) 의조공을받아태평성세를경영한다는미명하에 븮삼국유사븯권3 탑상4황룡사구층탑조, 븮황룡사찰주본기븯 건탑(建塔)역사(役事)를 일으킨 샤머니즘적 발상의 모티브이기도 했고, 경문왕 이래 신라 왕실이 신봉한 신앙의 핵심 거소(居所)에도 해당했다. 따라서 왕건이 9층 금탑에 올랐다는 것은 천년 왕조 신라의 정점에 군림함을 의미한다. 신라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장차 신라왕으로의 즉위를 도모하려는 왕건의 분출된 욕구는 이상 과 같이 포장되어졌다고 짐작된다.비록 꿈이나마 그가 9층탑 에 올랐으며, 이처럼 공공연히 내세웠다는 것은,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잠재된 무의식의 강렬한 표출이자 분출로서, 그의 마음 한 구석, 언젠가 지금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궁예를 뒤엎 고 나아가 삼한의 왕이 되겠다는 주체할 수 없는 역심과 야심 이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왕건의 권력 욕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산물임을 짐작하게한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15) Ⅰ.경애왕죽음이던지는의문 뱚Ⅱ.후삼국의시대상황과경애왕 뱚Ⅳ.왕건의복심,이중성 박 순 교 뱚Ⅲ.경애왕의집권과정 뱚Ⅴ.경애왕의현실인식 뱚Ⅵ.기록의행간에비치는왕건의야욕 목 차 Ⅰ.경애왕죽음이던지는의문 Ⅱ.경애왕과후삼국의시대상황 Ⅲ.경애왕의집권과정 Ⅳ.왕건의복심,이중성 Ⅴ.경애왕의현실인식 Ⅵ. 기록의 행간에 비 친 왕건의 야욕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