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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후에는 분단된 조국의 앞날과 좌우양극으로 민족이 분열되된 것을 항시 개탄해 왔을 뿐 지난 날의 파리장서에 관한 일들은 함구로 일관하였다. 춘추 50이 지나서 외당에 송강서실이라 현판하고 은인자중하며 여생을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서기 1970년 12월 초8일 형년 75세를 일기로 정침에서 영면하셨다. 배위는 진양정씨 기헌의 녀로 3남을 두었으니 백은 영국 중은 영태 계는 영탁이며 손남 상동 상남 상훈 상기와 손녀 상순 상분 상숙은 백방출이며 상웅 상건과 상임 상란은 중방출이고 상재와 경자 기숙은 계방출이며 여는 불록한다. 만시지탄이 있으나 공께서 타계한지 35년이 지난 을유년 11월에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하는 한편 국가유공자의 추모비건립사업비조로 국가보훈처 및 경남도청 그리고 합천군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지역유림과 각계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아담한 정자를 세우고 묘역 주변 환경조성과 병행하여 여기 추모비를 세워 공의 애국애족하는 대의의 정신을 기리고 숭고한 구국충정을 자손만대에 전하여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정해 국추에 장손 상동의 청으로 계부 영탁이 추진위원장 안재옥과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거늘 내 졸문을 무릅쓰고 끝을 맺기를 대저 그 사람을 선관하는 이 마땅히 그 본인의 절의와 자정을 논해야지 한갖 공적일사만 논할 수 없다. 일순간의 순사는 쉬울지언정 종신토록 수절함은 어려우니라. 저 간송은 언제나 청색을 머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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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종장인 면우 곽종석께 전말을 고하고 전국유림대표로붙 동의를 구한 다음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공은 본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족형인 신재 김상진과 더불어 왜경의 감시를 피해 은밀한 장소에서 논의한 끝에 장서에 기꺼이 서명 종인하였다. 당시 독립청원서에 서명할 자격을 50세 이상으로 정하였으나 적개심에 불타는 24세의 젊은 선비의 지조를 그 누구도 꺽을 수 없었으니 그 지기에 좌우가 경탄하였다. 한국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의 서명으로 동년 3월 23일 심산 김창숙이 장서를 간직하고 상해에 도착한 뒤 우리 대표로 파리에 주재하는 김규식에게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 사실이 성주 만세시위에서 체포된 송회근으로부터 탄로되어 면우 곽종석을 위시해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었고 혹은 망명 또는 순절하므로써 천지와 더불어 우뚝한 민족정기를 발휘하였다. 이 무렵 합천에서는 독립만세시위가 3월 18일 삼가장날을 시작으로 합천읍 대병 초계로 이어졌는데 이때 초계 시위를 주동한 이원화 전영우 등 제씨와 함께 3월 21일 초계장날 4000여 군중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던 공은 왜경의 추격을 받아 기진맥진으로 인사불성이 된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 시위에서 김장배 외 1명이 순국하고 그밖에 10여명이 부상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검거되어 갖은 고초를 당했다. 앞서 파리장서사건 이후 왜경은 연서인에 대하여 전국에 검거령을 내리고 색출에 혈안이 되었지만 공은 주소지를 허위 기재하였고 또 보명을 석구로 호적상 명은 오성으로 개명하였기에 혼란을 야기시켜 검거강을 피할 수 있었다. 장년기에 접어들면서 학문에 더욱 심취되어 소학을 즐겨 읽었고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등 위기지학에 전념하면서 일제의 학정에 비분강개로 세월을 보내던 중 패망을 목전에 둔 일제는 단말마적 발악을 다하더니 마침내 서기 1945년 8월 조국광복이 성취되고 국맥을 되살렸으니 어찌 우리 그날을 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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