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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석구이고 자는 문오이며 호는 송강 성은 전이며 관향은 완선이다. 비조는 백제 개국 원훈 환성군 휘 섭이요 파조는 완산군 휘 집이니 고려 공민왕조에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채읍지를 완산으로 하사받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현석학이 연선하고 손세가 번연하여 잠영세족으로 불리어온다. 공은 선고 휘 중경과 선비 연안차씨 사이에서 대한제국 고종 병(서기 1896)년 10월 14일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 월곡본제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시례가풍에 나염되어 사친경형에 독실하였으며 천성이 강의하고 지략이 뛰어나 향리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 온 공은 8세에 취학하여 족숙인 겸산중흡과 매봉 정기헌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장성하면서 일시 공산 송준필문을 거쳐 면우 곽종석 문하에서 사사하였으며 학문은 사서삼경을 근본으로 삼았다. 임진왜란때에 10대조인 영수공은 후숙부 탁계공 그리고 재종형인 수족당공과 함께 창의하여 왜적과 싸워 통쾌한 승리로 영명을 청사에 길이 남겻다. 한때 망우당 곽재우 휘하에서 창녕 화왕산 성내성을 구축 왜적의 침입에 방비하였으며 도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순절한 선조의 구국진충에 크게 감동되어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고 흠모해왔다. 을사 망국 조약과 경술합방으로 민족 치욕의 한을 개탄하던 중 서기 1919년 3월 1일 33인의 서명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자 때를 같이하여 일제에 대한 전국적인 민족항쟁이 일어났을때 심산 김창숙은 시점을 조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회로 삼고 만국평화회의에 글을 보내 일제침략정책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대한제국은 독립국임을 알림으로써 국제의 여론을 환기시켜 일제를 압박할 목적으로 파리장서운동을 계획하고 이중업 곽대연 등 제씨와 회합한 끝에 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