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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장날을 기하여 먼저 함안읍에서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9일 아침 동지들과 비봉산에 올라 고천제를 지낸 후 읍 중심지의 태평루에 큰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쥐게 하니 그 수가 2천이 넘었다. 선생의 호령에 따라 우편국 전화선을 절단하고 왜경 수명을 군중 앞에 꿇어앉힌 후 독립선언문을 낭돟가고 이어 자신의 무명지를 잘라 「대한독립만세」라고 혈서하여 흔드니, 흥분한 군중은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관공서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점거하여 수감중인 안지호 선생을 구출하였다. 이날 오후 마산에서 출동한 왜헌병 수십명이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하니, 성난 군중은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해질 무렵에야 해산하였는데, 선생과 동지 수십명이 체포되었으나 각 면에서는 장날마다 만세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선생은 이해 12월 부산지법 마산지원에서 6년의 형을 언도받고 형무소로 이감 도중 왜경을 때려눕히고 탈주하였다. 그 후 강상대로 변성명하여 교묘히 피신해 나가면서 군내의 서당을 신학문 강습소로 개편하고 몸소 군북 사촌강습소 함안 대산강습소에서 많은 애국청년을 배출시켰다. 1930년부터는 서울에서 이중건 선생이 경영하던 신소년사의 주필을 맡아 민족의식 앙양에 헌신하였으며, 1940년 소위 창씨제도가 시행되자 죽어도 왜식으로 성을 바꿀 수 없다고 항거하다가 마침내 자녀들의 학교 교육마저 포기하고 강원도 금화 오선산에 은거하면서도 비밀리에 민족 운동을 계속하던 중 1944년 향년 3세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오호라 선생 가신 지 30여년, 휴전선 북녘에 있는 묘소를 찾을 길이 없고 탄시인 '등전회우주' '객과인광음'을 알 사람조차 없다. 더욱이 6.25 동란 중 월남한 아드님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