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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조무준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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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1026 함안장터 3.1운동 만세시위 출발지 항일지사 백천 이희석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한편 그는 조한휘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에 대하여 전해듣고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면서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8일 밤, 그는 조한휘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의 문장이 너무 길어 1장에 등사할 수 없게되자, 이를 1장 분량으로 개작·축소하여 다량 등사하였다. 3월 19일 정오, 그는 이찬영과 함께 인근의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읍내에 분산하여 있던 시위군중에게 봉성동(鳳城洞)으로 모이라는 신호를 하고 곧 하산하여, 수백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오후 2시경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일시 피신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이해 12월 28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