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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 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새로이 많은 인사들이 거의하여 의병전쟁을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갔다. 또한 일제뿐 아니라 평소 일제의 정책에 부화뇌동하던 친일관료와 일제에 기생하며 민족 적 과제를 외면하던 부일배 역시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 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 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김응서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07 년 관동 의병장 정대무(丁大武) 의진에 가담하여 선봉장(先鋒將)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강원 홍천(洪川), 경기 지평(砥平)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활동하였으나 1908년 음력 정월 정대무 의병장이 해진하자 의병활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군사를 소모하 는 등 재거의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3월 경기 지평군 황경평(黃耕坪)에서 이연년(李延年)이 의병소모에 불 응하자 '바야흐로 나나 네가 진퇴(進退)하여 살길이 없거늘 어찌하여 의병에 가담하지 않 으려는고' 하며 의병 소모 전령문을 접수하도록 하여 군사를 규합하였다. 이후 일군과 수 차례에 걸쳐 교전하는 등 활동하다가 경기 지평 부근에서 피체되었으나 탈주 도중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4卷, 國家報勳處, 2000年, pp.139~140. (63). 김익삼 1. 약전(略傳) 성명 (異名) 활동 시기 출 신 거주지 생,몰 참고문헌 및 전 거 활동내용 등 서훈 및 포 상 김익삼 金益三 후기양평미상 〔양평의병운동 사 p.235〕 강상면 연양리 1908 귀순 보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