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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산이포(山伊浦) 등지를 수색하였지만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일군은 김수민 의 진의 민활한 작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 후에 김수민과 그의 의진에 대하여 일제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내리고 있다. "…군술(軍術)에 능하여 이산・집합이 또한 교묘하고 궁지에 몰린 때도 한두 차례가 아니었 으나 능히 빠져나가 지금도 부하를 곳곳에 흩어져 있게 하고, 자기는 적은 부대의 장수로서 출몰 배회하므로 그 체포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일제는 그것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 기회에 강화도 의병들을 소탕시킬 목 적으로 대수색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개성 수비대의 30명, 용산 주차 일군 보병 부대의 장졸 70명, 해주(海州) 수비대의 장졸 34명, 연안(延安) 수비대의 장졸 7명 등 을 동원하여 이들을 8대(隊)로 나누어 3일 동안 의병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수색전은 11월 26일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첫날 약 20명의 김수민 의진의 유격대원들은 정두동 (亭頭洞)에 매복해 있다가 지척 지간까지 접근하여 적군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여 7명 중 4명을 쓰러뜨리고 서북방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의병들은 이미 대부분 배에 승선 하여 황해도와 주변 섬으로 이동한 지 오래되었다. 1909년 2월 김수민은 적성(積城) 에서 그리고 3월에 강원도・충청도・황해도 일대에서 연기우(延基羽)・하상태(河相 兌)・이진룡(李鎭龍)・한정만(韓貞萬)・이인순(李仁淳)・정용대(鄭用大) 등과 더불어 활약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많은 평민들이 운집하여 그의 의병활동을 도왔는데, 그 중에 농업을 하던 이인식(李仁植)과 김거복(金巨福), 이창근(李昌根)이 5년 징역, 그 리고 소금 장사하던 최기서(崔起西)가 징역 7년, 농업 겸 유생인 전복규(全福奎)가 유 형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國民章)을 추서하였다. ☞ 出典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536~539. 註 ㆍ義兵들의 抗爭 327面 ㆍ抗日義兵將列傳 185面 ㆍ梅泉野錄 491・496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501・532・560・715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