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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록 할 뿐 아니라 산악전투에서 의병을 보호할 수 있도록 의병복장을 염색하여 입게 하였다. 그리고 민폐를 덜기 위하여 부호의 양곡과 의복을 징발하여 군용에 충당시켰 다. 이렇게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구성된 농민의병은 일찍이 을미의병 때 신돌석(申 乭石)・김운로(金雲老)의 의진에서 비롯되었지만, 김수민(金秀民) ・안규홍(安圭洪)의 정미의병에 이르러서 본격화가 가능하였다. 1907년 9월 김수민은 부하 병력이 300에 이르자 총기를 휴대케 하고 스스로 대장 이 되어 9월 중에 경기도 개성군 대흥산(大興山) 창고 내에 모아 둔 관군의 대포 30 문과 소포 150문을 탈취하여 병력을 강화시켰다. 10월 11일 밤 경기도 장단군 북면 에서 일병과 한 차례 교전을 하였으며 11월 27일 개성(開城)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 며 열은동(悅隱洞) 일대에서 농민들을 재규합하였다. 12월에 부하 100명을 이끌고 이 인영(李麟榮) 부대와 합병하고 이인영・이은찬(李殷贊) 등과 같이 경기도 내의 장 단・마전(麻田) 등 각지에서 세력을 떨쳤으며 황주・해주・서흥 등지의 일군 수비대 와 여러 차례의 교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수민은 전체 의진을 20명에서 30명 정도 의 인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한 후, 1908년 4월 16일에는 구화장(九化場) 헌병 분견소 를 기습 공격하여 일군 헌병을 살해하고 완전 점령하였으며, 이곳에서 다량의 병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그 후 장단・풍덕(豊德) 일대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때의 사실을 일제는 그들의 작전보고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이 토벌을 위해 장단 구화장 양합리(兩合里)・개성・풍덕의 각 수비대와 헌병 등이 협력 하여 실시하고 때로는 소집단을 궤란시켜 약간의 손해를 입혔으나, 아직 그 뿌리는 뽑지 못했 다." 이상에서 볼 때 김수민의 의진이 게릴라전에 얼마나 능숙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 있었던 김수민의 강화도 상륙전에서 그러한 면모는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 다. 강화도 전투의 전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김수민 의진은 본래의 근거지에서 점차 남하하여 1908년 10월 상순에 강화도를 기습 공략하여 그곳 재류 일인을 완전 처단 한 후 강화도를 회복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용산의 일군보병 제 13연대 1소대 30 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여 10월 30일 강화에 상륙시켰다. 이때 정족산(鼎足山) 전등사 (傳燈寺)에 웅거하고 있던 약 100명의 의병들은 접근해 오는 일군과 1주야에 걸쳐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일제는 31일에 다시 35명을 증파 하였다. 합진한 일군이 11월 1일 광성(廣城)으로 재상륙하여 전등사로 돌격하였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김수민의 의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란 일군은 별립산(別立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