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page

71 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맹영재를 찾아가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자고 권하였는데, 맹은 이해관계를 말하며 응낙하지 않았다. 백선은 크게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말하기를 “이런 대변의 때를 당하여 이 나라의 신민(臣民)된 자라면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목숨을 바쳐 싸워서, 살면 의로운 사람이 되고 죽으면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더구나 관청에 앉아 인부(印符)를 차고 있는 신하로서 위로는 군부(君父)의 욕보는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죽게 된 것을 동정하지 않는다면 주군(州郡)은 있어 무엇하느 냐?" 하며 총을 부숴 뜨락에 던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결하려던 참에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 永)이 찾아와서 의거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 군수 맹영재의 휘하에 포군(砲軍) 4백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김백선이 맹영 재와 동학 혁명군을 토벌할 때에 양성시켜 지휘하던 김백선의 수하 병력이었다. 김백선은 그들에게 설유하여 말하기를 "나나 공들이 모두 시골 백성으로 비록 나라의 녹을 먹지는 못하였지만 우리가 입은 옷 이나 우리가 먹는 밥이 그 어느 것이 임금의 주시는 물건이 아니랴. 이런 망극한 변을 당 하여 어찌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아서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 지 않을 수 있느냐" 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따르기를 맹서하였다. 여기서 이춘영・김백선 2인은 군사를 이끌고 이웃 지방인 강원도 원주군 안창역(安昌驛) 으로 모이게 하니 따라붙는 자가 백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안승우(安承禹)와 합세하여 크게 의거의 깃발을 드니 때는 1897년 1월 13일이었다. 이들은 원주 사람 김사정(金思鼎)을 총독(總督), 박운서(朴雲瑞)를 도령장(都領長)에 임명 하고 원주 군사들을 더 소모하여 따라오게 한 다음 1월 17일(음 12월 3일)에 충청도 제 천(堤川)으로 나와서 유진하였다. 이리하여 제천의진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이때 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대장소(大將所)를 설치하고 2월 3 일(음 12월 30일) 부서를 확정지었다. 김백선은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며, 충주(忠州) 진격을 결정하고 2월 16일(음 1월 4일)행 군을 시작하였다. 대군이 성 아래에 이르렀으나 성문이 굳게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밤에 김백선이 동문을 넘어 들어가서 성문지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었으므로 성을 함락시 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