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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2.공적조서 및 공훈록 <공적조서> <공훈록> 김경달(金敬達) 1849. 3. 15~1896. 2. 8 이명 : 慶達, 顯實 김경달은 원래 춘천부의 포군이었는데 천성이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지방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부(父)・조부(祖父)・증조부(曾祖父)・고조부(高祖父)의 생일까지 반드 시 새로 난 음식을 바쳐서 '김효자'로 불렀다. 일본의 정치・경제적 침탈행위에 분개해 오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 하고 일제의 내정간섭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에 참여할 뜻을 가졌다. 이때 류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을 중심으로 한 선비와 백성들 천여 명이 춘 천부에 모여서 습재 이소응(李昭應)을 대장으로 추대한 춘천의진이 형성되었다. 이소 응은 대장에 추대되면서 "…관망하여 곧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軍情)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이적 금수(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적자(亂臣賊子)의 도당이 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 라는 강경한 격문을 8도에 보내었다. 김경달은 이에 즉각 응하여 류중락의진에 소속 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춘천의진은 대개 선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술・전략에 익숙하지 못하 였고, 신우균(申羽均)・김귀현(金龜鉉) 등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급하고, 성중에 서도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생기게 되니 차츰 군심이 흩어져서 형세를 유지하기 어 렵게 되었다. 여기서 이소응은 병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몸소 지평(砥平)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 아가 협상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2월 17일(음 1월 5일)에 제천의 의암(毅庵) 류 성 명김경달한 자金敬達 이 명金慶達 성 별남 생년월일1849-03-15 사망년월일1896-02-08 본 적강원도 기타 春城 新東 八味 70주 소江原 春城 新東 八味 70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1991 훈 격애국장 공적개요 1896년 柳重洛 李晩應이 擧義하여 李昭應을 義兵將으로 推戴하고 春川義陣 을 編成할 때 砲軍으로 參陣하고 從軍 活動하다가 敵軍의 軍備와 兵力등에 對抗할 수 없어 陣勢가 흐트러질 때 被逮되어 戰死 殉國한 사실이 확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