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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 『증보 양평의병자료집』 끝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은 자기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는 말로, 정의(正義)를 위해 목숨을 희 생하는 것을 뜻한다(『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 사생취의(捨生取義)는 목숨을 던져 의로움을 취한다는 말로 의리 또는 의로움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는 선비의 올곧은 기개 를 나타내는 표현이다(『맹자(孟子)』. 영국의 데일리메일 기자 매켄지(F.A McKENZIE)는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국권회복을 기치로 후기의병이 일어나 극렬히 활약하던 1907년 가을, 충청ㆍ강원ㆍ경기도일대 를 돌며 의병을 취재한 내용을 사진과 함께 『조선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에는 양평의 남한강가에서 비로소 의병을 만나 대화를 나누 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며 그때 어느 의병이 한 말을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들은 죽어야 할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죽는 편이 일본의 노예로 생명을 부지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그리고는 의병들의 사진도 함께 남겼다. 살신성인과 사생취의는 물론 강제로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스스로 항쟁에 나섰던 의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오롯하게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사진에 있는 13분을 포함한 2천여 양평의병 중 약전을 올린 330여 분 말고는 이름 석 자나마 알 길이 없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관동대장이라 칭하는 김경유(金景有)가 의병 70명을 이끌고 북면장 이종덕(李鍾德)ㆍ상북면 고유리장을 잡아가 그 곳 수비대장 이하 34명이 6일에 토벌에 착수했다”는 지평군 여물리장 (余勿里長) 이건영(李健永)보고를 보도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1908.2.14.자 기사, 김약유(金若有) 의병이 지평(砥平)에서 일군과 교전했다는 「고종시대사」의 1908.2.9.자 기록, 양근의병 윤공필(尹公弼) 등을 판결했다는 「고종시대사」 1908.3.31.자 기록, 의병장 황 재호(黃在浩)인지 이재호인지 성도 확실하지 않은 의병장이 이헌찬(李憲讚 ; 이은찬의 다른 이 름)의 부하 1단과 함께 포천군과 양근군에서 배회했다는 『대한매일신보』 1908.9.25자 기사와 「고종시대사」1908.9.25자 기록, 양평주재 일본헌병대 의병혐의자 김영태(金永泰)와 라봉산(羅 奉山)을 체포 경성재판소로 이송했다는 『대한매일신보』 1909.1.17.자 기사가 있음에도 양평의 병 약전(略傳)에 올리지 못하는 죄를 지은 것만 같아 김경유ㆍ김약유ㆍ윤공필ㆍ황(이)재호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