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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 자. 화서연원독립운동기념비문 차. 양평의병전투지, 용문사 게시문 카. 양평의병전투지, 상원사 게시문 (전략) 화서학파의 위정척사는 척양척왜라는 통일된 민족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국민족주의 사상이다. 이에 적극적인 화서문하연원들은 용문산에 모여 가장 먼저 의병투쟁을 모색 한 바 있다. 용문산 동남쪽 양동면에는 금왕산이 있으니 그 남쪽 석곡리에서 화서학파 의 안종응ㆍ이춘영ㆍ안승우 제현이 1895년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이 의병항쟁은 근대민족독립운동 50년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으니, 연해주의 한국의병창의 대장 류인석, 만주의 대한독립단 도총재 박장호,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과 주석 김구로 이어져 한국 근대 항일독립투쟁의 맥락을 이루었다. (이하 생략)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 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용문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항일활동을 펼쳤다. 조인환 의병장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삼아 인근지역의 관아와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하여 일제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 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와 용문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때 용문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