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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아. ‘국맥 지평의병발상지’ 표석문 라는 데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결론적으로 양평군 양동면은 명실상부한 1895 년 을미의병(지평의병)의 발상지였다. 양평문화원 양동분원의 요청으로 2011년 봄에 짓는다. 지은이: 독립기념관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김호일 경기향토문화연구소연구위원 전 경원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장삼현 세운이:양평군 양동면 양평문화원 양동분원 세운날:단기4345년 서기2012년 임진 10월 28일 1895년(乙未年) 8월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같은 해 11월 공포된 단발령 에 항거하여 곡수에서 살고 있던 괴은 이춘영은 당시 지평현 상동면(양동) 퇴앙 안종응 과 의병거의를 상의하였고, 지평현 장둔면(청운) 김백선 장군은 지평관아에 의병거의를 청하였으나 지평관아에서는 의병거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춘영 장군과 김백선 장군은 지평포군 400명을 모집 창의하여 원주 안창으로 이동한 후 을미년 11월 28일 「지평의병」의 깃발을 들었다. 지평 금리(월산리) 금계 이근원 선생(화서 이항로 선생의 후학)은 문파의 전략을 지원하 였고 그에게서 학업을 닦은 안승우 장군(안종응의 아들)등 후학과 평민들이 합류하여 의 병의 수가 1천여 명에 달했으니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원주관아 점령에 이어 제천, 충주, 단양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인근지역 의병봉기 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일 「지평의병」은 17세의 지평 소년의병 손용문(손덕화 의병의 아들)과 금계선생의 후학인 천낙귀 등 평민들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 었으니... 지평! 지평! 국맥 「지평의병」이여!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항쟁했던 선열들의 호국정신을 후세 만대에 기리고자 한다! 2012년 6월 1일 양 평 군 지평의병정신선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