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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 보이는 등 天人共怒할 만행을 계속하였다. 朝廷에는 賊黨이 들끓어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亂臣賊子를 누구나 다 벨 수 있는 것은 春秋의 筆法이요 먼저 적을 치고 뒤에 告하는 것은 後賢들의 達權이다. 이에 柳麟錫先生이 제천 장담에서 門人 士友들과 處變의 도리 를 論議하였는데 夏史 安承禹, 槐隱 李春永 두 義士는 擧義掃淸을 주장하였다. 이때 槍을 준비하고 賊黨이 오기를 기다리던 退央 安鍾應과 夏史·槐隱·金思鼎·金容俊의 사 등이 謀議하여, 槐隱이 金伯善을 설득하고 고을 사람을 義理로 깨우쳐서 수일 만에 義兵 四百여 명을 모집하였다. 드디어 단기 四千二百二十八年(1895)乙未 十日月 二十七 日 지평에서 擧義하여 밤새도록 군사와 병기를 원주 안창리로 집결시켜 다음날 倡義護國 의 깃발을 높이 드니 전국 의병 중에서 가장 우뚝하였다. 夏史는 順興人이니 丙子節臣 安光郁의 九代孫이며 父는 鍾應이요 槐隱은 德水人이니 澤堂 李植先生의 九代孫이며 父는 敏和이다. 두 의사는 楊東에 世居하였는데 호걸의 기 상으로 장대한 뜻을 품었다. 함께 省齋·毅庵 두 문하에서 衛正斥邪의 義理를 배워 捨生 取義하고 殺身成仁하였으니 참으로 지평의병의 두 주역이다. 金伯善도 지평사람인데 의 리와 기개가 있어 槐隱을 따라 동참하였다. 義陣은 원주를 거쳐 十二月 三日 제천에 이르러 實谷 李弼熙의사를 대장으로 세워 義 陣을 편제하고 九日 장회협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二十日 영월에서 다시 柳麟錫先生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義陣을 개편하였으니 중군장 李春永, 전군장 安承禹, 후군장 申芝秀, 선봉장 金伯善, 좌군장 元奎常, 우군장 安成海, 참모 朴冑淳, 사객 張忠植, 종사 李肇承, 洪選杓,李起振,鄭華鎔 등이다. 毅庵先生이 軍令을 실시하고 八道에 檄告文을 보내 총궐기하여 復讐保形할 것을 호소 하니, 李康秊·禹冀鼎·李鎬承·李明盧·金泰元 등 의병장들이 사방에서 적극 호응하였다. 毅庵先生은 제천과 원주사이에 大陣을 두어 西北의 강한 砲軍을 모으고 東南의 人材와 錢穀을 모집하여 굳게 지키며 八道의 인심을 鼓動시킨 후에 목표를 성취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제천·충주·단양·청풍·영월·평창·예천·안동·천안 등지에서 일진일퇴의 勝敗를 거듭 하며 各郡 官衙를 점령하고 적당을 토벌하였다. 그 중 丙申年(1896)正月 五日에 시작된 충주전투는 城을 점령하고 관찰사 김규식을 베 는 전과를 올렸으나 守城戰만도 二十八차례나 하는 등 四개월 동안 지속되고 李春永·朱 庸奎·安承禹 의병장 등이 전사하여 義陣의 중추가 악화된 가장 치열한 血戰이었다. 마침 내 張基濂 軍과 왜군의 협공에 힘이 부족하여 의병진은 城을 내어주고 후퇴의 길을 걸어 야 했다. 義陣은 軍令을 위반한 將卒 김백선·오장문·유난형 등을 처형하여 軍紀를 세워가며 싸웠 으나 본디 力不足이라 힘을 길러 재기할 계획으로 강릉 춘천 안변을 거쳐 초산전투에서 승리한 후 阿夷城에서 再檄百官文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이동하던 중 同年 七月二十八日 회인현에서 강제로 무장해제 되어 義兵陣은 거의한 지 八개월 만에 해산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