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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 물리치고 구제도를 회복하려 하니 君이 두령이 되어 큰일을 이룩하자”라고 이연년을 의병 장에 추대함에 이연년은 이들을 이끌고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지평의 愚谷에서 이들과 함 께 金春洙 의진에 합류하였다. 이연년은 김춘수 의진의 종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보름께는 홍천의 角吉里에서 교전하였다. 1908년 정월(음)에는 귀순한 의병장 丁大 武의 선봉장 金應西와 지평의 黃耕平에서 의병을 재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대송 면 曲水에서 한인순사 金年相을 살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08년 3월 청운면 삼성리 의 벗고개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치열한 전투 중에 유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지평옥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서울로 이송되어 그해 5월 22일에 평리원에서 내 란죄로 유배 10년형을 선고받고 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가 끝난 후 그는 대흥 리 본가에서 大谷書堂을 열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79) 정부에서는 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 李再福(1881~?) 양평의 지평 上洞面 三上里 출신으로, 판결문에 의하면 직업이 농업으로 되어 있다. 1908년 3월부터 7월까지 李正肅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일 본수비대와 총 4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치열한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8년 9월 1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7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80) 정부 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을 기렸다. 20) 李千甫(李天甫) 양평군 남시면 학곡리 출신으로 김춘수 의병진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12월 14 일(음) 양평군 용암리에 거주하는 李春明을 비롯하여 高正卜⦁辛元英와 함께 남시면에서 군수품을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춘명은 이 일로 체포되어 1901년 4월 징역 5 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천보의 그 후의 행적은 확인이 안 된다. 81) 79) 「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3, 509, 734쪽.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17~118쪽. 이중신, 「이연년」 『백운문화』4, 1987, 171~173쪽. 80)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215쪽. 81)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