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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 16) 李鳳夏 금계 이근원의 문인으로 1895년 지평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77) 17) 李聖瑞(聖西)⦁李昌俊 부자 의병 이성서(1856~1909)는 판결문에 의하면, 지평의 楊谷 출신으로, 1909년 당시 경성의 중 부 小笠洞에 거주하였으며, 54세로 직업은 미장이였다 한다. 1907년 음력 7, 8월경에 鄭 在學 의병에 들어갔으며, 8월 1일(음) 정재학 의병장을 비롯하여 80여 명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경기도 적성군과 마전군 등지에서 활약하던 중 일본인 약상인 岸本源四郞을 총 살하고, 같은 달 신중원과 의병을 거느리고 경기도 삭녕군 읍내에서 주사 모씨로부터 총 30정과 탄약 5근, 돈 160원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아들 李昌俊과 함께 황해도 토산군 토산시장에서 동장과 집강 등을 붙잡아 220원을 모집하고 군청의 이방을 위협하 여 탄약 1상자와 탄환 3천 발을 탈취하였다. 이들은 체포되어 1909년 11월 19일 경성지 방재판소에서 이성서는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12월 14 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으며, 이창준은 징역 2년 6개월에 처해 졌다. 78) 이성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18) 李延秊(1874~1944) 이승룡의 장자로 1874년 12월에 양근의 대흥리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穆年이고 일명 得 年이며, 자는 敬文, 호는 松石이다. 벼슬은 副司果에 올랐다. 그는 선친이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가 적에게 살해당한 후 항상 왜놈을 증오하고 복수심에 불탔다. 그 는 1907년 왜적이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사건을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 였다. 그는 그해 7월 초순경(음) 양근에 거주하는 閔基熙의 초청을 받고 지평군 馬川 大 洞에 가니 포수 30여 명이 집결해 있었다. 민기희는 “현재 정부 대신의 국가를 그르치는 것이 이처럼 심하여 강토와 생령이 회복할 여지가 없게 되었으니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을 77) 김승학, 『한국독립사』, 669쪽.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42쪽. 78)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31~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