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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 후퇴하였다. 용문사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조인환 의진과 함께 활동하던 권득수 의병은 1907년 8월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중대장, 明石)의 급습을 받았다. 아카시가 이끄는 제9중대 는 8월 23일 양근에 도착하여 24일 의병의 근거지인 용문사를 불태웠다. 55) 의병은 상원 사와 운필암으로 후퇴하면서 항쟁하였다. 8월 말에는 양근의 水回里 일대에서 군자금 모 금 등의 활동을 하였다. 8월 31일(음, 7월 23일)에 해산군인인 金聖完이 수회리에서 권득 수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왔다는 진술이 이를 말해 준다. 또한 이 진술에 의하면, 권득수 의병장은 매일 의병들에게 급료를 주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56) 권득수는 9월 8일(음, 8월 1일)에는 楊洲의 檜村으로 가서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申載萬에게 국가를 위하여 창의할 것을 권유하고 자금 5만원과 洋銃 및 鳥銃 등 13정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57) 권득수는 1907년 9월(음) 원주의병장 민긍호 부대를 비롯하여 張箕煥의병⦁崔斗煥의병 ⦁韓甲福의병⦁朴來福의병⦁朱錫敏의병 등과 연합하여 인제군 일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 다. 이때 이 연합의병이 1만여 명에 달했다고 신창현은 진술하였다. 58) 이로 보아 권득수 의병의 행적이 1907년 음력 9월까지는 확인된다. 1909년 3월 16일 경기도 관찰사 金思 黙이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보고한 『폭도사편집자료』에 의하면, 권득수에 대하여 “현재 소 재 불명인 바 일설에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고도 전한다” 59) 라고 부하에게 살해되었을 가 능성을 언급하였으나 권득수 의병장의 사망일시와 경위가 아직 확인이 안 된다. 60) 권득수 가 용문사 일대에서 활동할 때인 1907년 8월말 인근의 오촌리 金崙求의 99간 저택이 권 득수 의병에게 무기와 군량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61)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5) 「조선폭도토벌지」 『독립운동사자료집』3, 692쪽. 56) 『독립운동사자료집』별 집1, 12쪽,「김성완판결문」. 김성완은 체포되어 1907년 11월 5일 유형 7년형을 선 고받았다. 57)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2~13쪽.「판결서 형제 4호 56호」. 58)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69쪽. 이 자료에 權得珠라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權得洙의 오기로 보인다 . 신창현은 1908년 6월 18일 (음, 5월 20일) 체포되어 9월 15일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59) 『독립운동사자료집』3, 507쪽. 60) 「폭도사편집자료」에 의하면, 黃在浩(약 37세, 포천군 산내면)에 대한 기록 중에 “그 해(1907년, 필자) 9 월 상순 적성군 폭도 權得洙라는 자로부터 더불어 일을 일으키자는 꾀임을 받았으나 일단 응낙하지 않았 다. 그러나 당시 이미 폭도의 수괴로써 행동하려는 의사가 있었다. 그 후 도당을 모아 권덕수와 합동하였 으나 서로 불화하여 마침내 권덕수를 살해하고 스스로 수괴가 된 자로서”(『독립운동사자료집』3, 509~510 쪽.)라고 하여 권덕수가 黃在浩(보병 하사 출신)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때의 權德洙가 權 得洙가 아닌가 한다. 61) 김윤구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독립운동사자료집』5 , 4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