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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 (참모장, 金壎)과 許爲 등의 연합의진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목표로 전국 의진에 통문을 돌리고 작전을 개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41) 일본군은 이 부대를 공격하고자 赤倉 대위가 인솔하는 1개 중대가 11월 6일 원주를 출발하고, 이보다 앞서 서울에서 坂部 소좌가 또 다른 1개 중대를 인솔하여 왔다. 三山戰鬪는 11월 7일부터 2일에 걸쳐 있었다. 의병은 일본군의 포화에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삼산에서 철수하여 목적지인 양주를 향하여 이동하였다. 이 연합의병에 양평에서는 김춘수가 安無將으로 참전했다. 42) 일본군의 양평지역에서의 의병에 대한 탄압은 혹독했다. 의병의 근거지라고 하여 유서 깊은 사찰인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불태웠다. 상원사와 용문사는 일본군 보병 제52연 대 제9중대에 의해 1907년 8월 24⦁25일간에 불태워졌으며 43) , 사나사는 그 해 10월 27 일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11중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44) 또한 일본군은 양평지역에서 수많은 민가를 소각시켰다. 1907년 8월에 지평의 水洞에서 200여 호를 소각했으며 45) , 10 월에는 양근 읍내에서 200여 호, 사탄과 역곡에서 90여 호, 옥천에서 20여 호의 민가가 일본군에 의해 소각되었다. 46) 11월에도 양근읍에 군의 관아만 남고 민가 수백여 호가 소 각되었다. 47) 한편 1907년 가을 영국의 신문기자 매켄지가 양근읍을 가서 의병을 만나고 의병의 사진 을 남겼다. 매켄지가 양근읍에 들어가니 우선 민가마다 대문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 을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군이 일주일 전에 양근읍을 습격하여 민가를 소각하였는 데, 십자가가 있는 집을 불태우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간 뒤에 집집마다 대문 위에 십자가를 그려 붙였다는 것이다. 48) 매켄지는 그 장면을 찍어 자신의 책에 게재하였다. 또한 매켄지는 우리에게 소중한 의병 사진을 제공하고 있는데, 바로 의병 10여 명이 총 41) 「폭도에 관한 편책」, 韓憲警 乙 제 404호, 융희2년 4월 9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10, 128~129쪽). 42) 「폭도에 관한 편책」, 원비발 제46호의1, 1907년 11월 10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8, 104~5쪽) ; 같은 책 한헌경을 제404호, 융희2년 4월 9일(『한국독립운동사자료』10, 128~9쪽). 신용하, 「전국 ‘십삼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7, 17~18쪽. 43) 「參1發 제83호」(1907년 8월 28일)『한말의병자료』4, 독립기념관, 58쪽.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일본 참모총 장에게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는 24,25일 양일간에 적의 근거지인 上元寺 및 龍門寺는 집적해 있던 다량의 양식과 함께 불태웠음”이라고 보고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독립운동사자료집』3)에 의하면, “양근, 이천 방면으로 파견된 명석 중대는 23일 양 근에 도착, 24일 양근 동북 약 20리에 있는 폭도의 소굴인 장수동 連安幕을 습격, 궤란하는 폭도를 습 격하여 龍門寺 근거지를 무찔러 장래의 화근을 끊기 위하여 그것을 소각해 버렸다”(692쪽)라고 보고되어 있다. 44) 「조선폭도토벌지」(『독립운동사자료집』3,709쪽)「10월의 폭도토벌」에 의하면, “보병 제51연대 제 11중 대 (중략) 27일에는 양근 북방 사나사에서 약 150의 폭도를 습격 궤란시키고 舍那寺를 소각해 버렸다 ” 라고 10월 27일 사나사의 소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45) 《황성신문》, 1907년 8월 29일, 잡보. 46)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8일, 「楊邑又燒」. 47)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6일, 잡보. 48) 매켄지(신복룡 역), 『대한제국의 비극』, 탐구당, 1980, 2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