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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6) 李春永(1868~1896) 경기도 楊平의 지평 출신이다. 자는 友三, 호는 槐隱이며 본관은 덕수이다. 부친 敏和와 고령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흥부원군 金悌男의 10세손인 연안김씨 憲秀의 딸과 혼인하였다. 35) 「육의사전」에서 그를 표현하기를 성품과 기질이 준수하며 얼굴은 冠玉이요, 목소리는 우레와 같고 눈썹에는 놀빛 이 서리고 눈은 샛별 같으며 기개가 우뚝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세상과 더불어 타협하지 않고 성인의 큰 도를 즐겨 들으며, 활달하고 포용심이 있고 점잔 하여 덕을 이룬 군자와 같으니 보는 사람은 모두 장래에 크게 쓰일 인물로 기대 하였다. 36) 라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준수한 인재라 평하였다. 그는 고향 선배인 안승우를 통하여 화서학파의 존화론에 심취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며 나아가 일제의 내정간섭을 저지하기 위하여 창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여주에 우거하고 있던 그는 선배인 安承禹 집에 찾아가 안승우의 부친 안종 응으로부터 거의를 권유받고 김백선을 만나 의기투합되었다. 이어서 김백선, 안승우와 함 께 原州의 安倉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이들은 지평의 포군 4백여 명을 영입하여 의 병진을 조직하고 원주를 점령하여 수일간 주둔하였다가 堤川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이 필희를 대장에 추대하고 이춘영은 중군장이 되어 단양의 장회협 전투를 지휘하여 적을 크 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 이민옥 등의 간계로 의진이 와해되었으나 이춘영은 안승우 등과 함께 이를 수습하여 영월에서 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새 의진을 편성하였다. 이춘영은 중군장이 되어 의진을 忠州로 옮겼다. 그러나 1896년 2월 17일 충주성에 입성 한 다음날부터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인근의 많은 의병들이 충주로 모여들고 원조하여 의진의 형세가 크게 떨쳤다. 이때 이춘영은 중군장으로 성중에 있으며 각 군을 독려하고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42쪽 李延年, 「康翎公諱承龍家狀」(필사본, 장삼현,『양평의병운동사』). 이중신 ,「호국대의에 몸바친 이승룡의병장」『백운문화』4, 1987, 168~171쪽. 35) 『增補九刊德水李氏世譜』 總編 참조. 36) 「육의사열전-이괴은전」 『독립운동사자료집』1, 178~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