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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남한산성의 賊數는 약 1천6백 명으로 그 중에 1천 명은 廣州, 利川, 陽根 등의 포군, 즉 구지방병이고 그 나머지 6백 명은 광주의 농민이다. 적의 수괴는 광주의 병장 沈營澤, 이천의병장 朴周英, 양근의병장 李錫容의 3인이다. 32) (밑줄 필자) 라고 하여 남한산성의 의병 중에 광주의병과 이천의병, 양근의병이 1천여 명에 달하며, 양근의병장으로 ‘李錫容’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이석용이 바로 ‘이승룡’으로 보인다. 당시 양근의 의병장으로 남한산성에 입성한 이로는 이승룡 외의 인물이 아직 확인이 안 된다. 동경조일신문사 기자 西河通徹이 이승룡과 비슷한 발음인 이석용으로 잘못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의병은 3월 22일(음, 2월 9일)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성을 내주고 양근 방 향으로 패산했다. 이때의 정황을 《동경조일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원래 同地의 賊은 廣州 利川 安城 陽根 등 諸賊이 烏合된 것으로(중략) 22일 오 전 2시경에 산성의 서문에서 忽入해 바로 山頂에 올라 성을 내려다보고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또 大聲하였더니 적은 예상보다 더 兵氣沮喪해 있다가 위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받자 낭패하여 급히 동문에서 陽根방향으로 궤주하였다. 4시 반 경에는 險要無比의 남한산성은 征討軍에 점거한 바가 되었다. 정토군은 적을 쫓 아 30명을 生擒하고 동문 부근에서 20여명을 죽이고, 다음에 生擒者도 살해했다 한다. 33) 이에 의하면, 남한산성에 웅거하고 있던 양근을 비롯한 광주⦁이천⦁안성의 의병이 3월 22일 새벽 2시경부터 관군의 공격을 받아 4시반경에 동문을 통하여 陽根(楊根의 오기, 필자) 방향으로 궤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문의 공방전에서 20여명이 죽었고 포로 30 명도 모두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승룡은 2월 하순경에 양근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으며, 위 《동경조일신문》 4월 1일자의 기사에 의하면, 기사 발송일인 3월 18일 현재 양근의병장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그가 서울의 尹某로부터 내외에서 협공하자는 비밀 서신을 받고 상경 하였으나 오히려 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896년 3월 27일(음, 2월 14일) 남한산성에 서 살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34) 32) 《東京朝日新聞》, 1896年 4월 18일, 「南漢山, 賊狀」. 33) 《東京朝日新聞》, 1896년 4월 5일, 朝鮮時事,「南漢山賊徒潰走」. 34) 李昭應, 『昭義新編』, 「斥和擧義事實大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