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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 15) 李承龍(1853~1896) 이승룡의 자는 秀雲, 호는 錦坡이다. 본관은 靑海이니 靑海伯 襄烈公 李之蘭의 15대 손 이다. 경기도 양근군 동종면 대곡리(현, 양평읍 대흥리)에서 부친 五衛將 殷錫과 경주 최 씨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10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13세에 안동 김씨와 혼인하 였다. 14세 때인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벽에다 ‘의병장이승룡’ 이라 써놓고 상경했다고 전한다. 25세 되던 1877년 무과에 급제하여 부호군의 직에 올랐 으며, 1882년 임오군란시 민겸호가 살해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그 아들인 민영환 집으로 호송하였다. 이 일로 민영환과 교분이 두터워졌다. 1890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강령현감과 해주진관 병마절제도위에 임명되었다. 그는 그해 2월에 강령현감으로 부임하여 延安지역 의 南大池 아래에서 경작하는 주민들이 관개 문제로 민요가 일어남에 이를 해결하고 節 目을 정해 수습하였다. 28)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민영환을 만나 통곡하고 양근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 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는 ‘斥倭國母報讎之旗’라는 기를 30여 개 만들어 세워놓고 의병을 모아 전술훈련을 시켰다. 그는 가사를 아들인 延秊에게 맡기고 의병을 이끌고 서울을 향하여 음력 1월초(양력으로 2월 하순에 해당함)에 남한산성에 들 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광주군수 朴基仁을 체포하여 참하였다. 29) 김하락의 이천의병 은 양근의병이 입성한 이후인 2월 28일(음, 1월 16일) 남한산성에 입성한 것으로 보인 다. 30) 이에 대하여 김윤식도 그의 『속음청사』에서 “양근과 광주의 匪徒들이 남한으로 모여들 어 백성들의 전곡을 거두어들이며 굳게 지킬 계획을 하여 京營兵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고 대포 1문을 잃었다. 적세는 더욱 떨쳤다 한다.” 31) 라고 하여 의병을 ‘匪徒’로 보 는 관리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남한산성에 양근의 병사들이 주력부대의 하나로 편성 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양근의병이 바로 李承龍이 모집하여 이끌고 간 부대로 보인다. 즉, 《東京朝日 新聞》 1896년 4월 1일자(3월 18일 경성 발)에 의하면, 28) 「延安南大池水稅節目」(辛卯 光緖 17年正月 成冊). 이승룡 관련 자료는 이외에도 강령현감으로 재직시 기록한 「光緖 17年8月 日 本縣重記成冊」과「康翎縣 監李承龍日記」(1891년 5월 9일~1891년 5월 14일)를 증손 李重臣댁에 소장되어 있다. 29) 李延秊, 「康翎公諱承龍家狀」(필사본) 30)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17~18쪽. 단, 김하락의 『진중일기』에서 는 ‘1월 30일’(양, 3월 13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1) 김윤식, 『속음청사』권8, 394쪽, 1896년 3월 2일자. “聞陽根廣州匪徒 聚于南漢 斂民錢穀 爲固守計 京營兵攻之敗退 失大砲一尊 賊勢愈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