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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 희들이 나를 죽이려면 빨리 이리로 오너라.”고 소리질렀다. 24) 결국 안승우는 적의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이때 안승우의 제자로서 중군 종사로 활약하던 19세의 청년 洪思九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유명하다. 정부 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2) 安鍾曄(安鍾燁, 1864~1908) 지평의 양동출신으로 자는 元春이요 본관은 순흥이다. 1864년 5월 부친 潤玉과 모친 초 계정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승우와 이춘영이 의병을 일으켜 제천으로 이동한 후 그는 제천의병의 지평수성장으로 활동하였다. 1896년 2월 12일 지평의 향교소임 徐炳斗 를 치죄하도록 하였다. 서병두는 지평의 아전들과 함께 의병의 지휘권을 빼앗고 의병에게 군비를 제공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안종엽은 3월 3일에는 수성장의 직임의 사퇴를 청 하였으나 대장소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4월 3일에는 지평군수 맹영재의 아들 맹일호가 의 병에 군량을 제공하지 못하게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제천의병을 끝까지 지원하였다. 25) 13) 李鳳夏 지평 출신으로 이근원의 문인이다. 1896년 양근에서 起義하여 主將으로 활동하였다. 26) 14) 李鵬九 지평 출신의 유생으로 지평의병에 참여하였다. 27) 24) 「의암류선생서행대략」, 위의 책, 481~482쪽. 25)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독립운동사자료집』1, 404~405⦁428⦁458쪽. 이에 의하면, 崔三汝의 홍천에서 1896년 3월 거의한 후 지평에 와서 전날의 상관이었던 맹영재에게 의병 참여를 권유하였으며, 이에 맹영재가 의병에 참전하였다가 양근의 美源에서 서울에서 파견된 군사에게 죽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구전에 의하면, 맹영재는 부득이 참전하였다가 수비대가 오니까 환영 나가 다가 부하한테 죽었다는 설도 있다(장삼현, 『양평의병운동사』, 167쪽). 맹영재의 아들인 孟一鎬는 아버지 를 죽게 한 것이 최삼여 때문이라며 최삼여를 죽였다. 의진 역시 해산되었다. 맹일호는 그 후에도 지평 출 신의 포군들을 제천 의병진에서 꾀어내는 일을 벌이자 안승우는 孟賊을 언제나 목 벨 수 있단 말이냐“면 서 별모장 이필희에게 통고하여 맹일호를 치게 하였다(위 글, 457~458쪽). 26)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1956, 42쪽. 27) 『대한독립항일투쟁사』 하권 참조(『양평의병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