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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 이들은 文成公 安裕의 후예로 경기도 砥平의 上石里 출신으로 1896년 지평의병, 제천의 병의 주도자들이다. 安鍾應(1845~1906)은 자를 呂聲, 호를 退央이라 한다. 부친 相玉과 한산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22) 아들 安承禹와 李春永 등이 일으킨 지평의병의 후원자로서 활동하 였다. 經史에 뛰어난 학자였던 안종응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을 일으킬 뜻을 세우고 아들 안승우와 이춘영에게 의병 거의를 권고하고 이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원주 安倉에서 거의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안종응은 의병의 전투력을 증강 하기 위하여 포군 金伯先을 의병부대에 끌어들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지평의병은 제천으로 가서 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류인 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자기 대신에 안종응을 의병대장으로 추천할 만큼, 안종 응은 의진 내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에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安承禹(1865~1896, 자 : 啓賢, 호 : 下沙)는 안종응의 장자로 태어나 省齋 柳重敎의 문 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에 대한 소식에 접하고 성재 문하의 인사 들과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부친으로부터 안창에서 李春永과 金白善이 거사하기로 했 다는 연락을 접하고 달려가서 11월 28일 지평의병을 창의하였다. 뒤이어 서상열이 동문 인 李弼熙 등과 제천으로 달려왔다. 12월 3일에 李弼熙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徐相烈을 군사로, 李春永을 중군으로, 안승우 자신은 軍弼都有司가 되어 군용을 정비하고 친일 매 국 역당의 앞잡이 張基濂의 군대 및 왜적의 무리와 혈전을 겨루었다. 첫번 싸움은 단양 長匯峽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의진은 관군의 공격에 군사를 모집하기 위하여 영남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때 안승우는 제천의 본진에 있었는데 군수가 관군을 이끌고 제천에 진입함에 의진을 이끌고 제천을 나와 毛山에 사 는 판서 沈相薰을 찾아가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관동지방으로 이동하여 백여 명의 군사를 얻었다. 안승우는 모병한 의병과 함께 영월로 들어가 류인석을 의병장 에 추대하고 자신은 전군장의 직임을 맡았다. 1896년 2월 17일 의거에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입성하였다. 입성한 다음날부터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2월 23일 중군장 이춘영이 수안보에서 교전 중에 전사함에 중군장으 로 임명되었다. 안승우는 의병장 류인석을 보좌하면서 제천으로 이진하여 수안보와 가흥 전투를 수행하였다. 제천 본진에서는 후방 대책으로서 단양⦁청풍⦁원주⦁영월⦁평창⦁정 선⦁지평 등지에 수성장을 임명 배치하여 해달 읍성을 장악⦁관리하고 군사의 소모와 군 22) 『順興安氏東塢公譜系』하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