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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로 싸워 죽은 자가 오늘날 같은 적이 없었다. (중략) 슬프다. 이 국적놈들이 화친 을 부르짖어 임금님을 위협하고 여러 신하를 우롱하더니, 마침내 국모께서 시해를 당하시고, 임금께서 머리를 깎으시게 되어, 큰 둑이 한 번 무너지매 인류가 금수 로 돌아가고, 예악이 糞土에 빠졌으니 이는 천지간에 처음 있는 큰 변고였다. (중 략) 아! 전번 忠原 싸움에서는 외로운 성과 약한 군사라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짐 짓 후퇴하여 군기를 수선하고 무력을 단련하여 형세를 관망하고 틈을 노리던 차, 불행히도 너희들이 저놈들의 악독한 칼날을 만나 같은 때에 싸우는 자리에서 목 숨을 잃고 겸하여 불에 타서 형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한 곳에 묻게 되었으니, 그 정경은 참혹하지만 그 의리만은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다. 16) 김재관은 제천의 7의사묘역에 안장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6) 金振德⦁金振根⦁金振基⦁金振文⦁金振淳⦁ 金振勝⦁金振靈⦁金振縣 金振德(1859~1931)은 지평군 양동면 금왕리 사람으로 자는 士俊, 호는 石愚, 본관은 강 릉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위풍이 비범하였으며 號令이 막강하여 세칭 호령대감이라 불렸 다. 김백선과는 한울타리에 거주하던 절친한 사이였다. 김백선과 함께 의병에 참여할 때 동생 金振根(1873~1947, 자 : 士惠, 호 : 東雲)과 족제인 金振基(1871~1948, 자 : 士交) ⦁金振文(1865·1936)⦁金振淳(1874·1922)⦁金振勝(1974~1933)⦁金振靈(1874~1932)⦁金 振縣(1863~1917, 자 : 士集) 등을 데리고 지평의병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진덕은 김백선이 사형된 후 護喪이 되어 고향인 갈운리에 장례 지냈으며 두 집안의 世交는 지금 까지 이어진다. 17) 7) 朴廷和 1877년 지평의 도곡리에서 태어났다. 錦溪 李根元의 문인으로, 자는 景朝, 호는 省庵이 16) 『독립운동사자료집』1, 116~117쪽.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의 책, 423~424쪽. 17) 『강릉김씨한림공파대동보』 권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