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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 이동했다가 광주 등지로 빠져나갔다. 일제는 의병의 마지막 항쟁지로 떠오른 경기 서북부 지역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1910년 11월부터 4개월 동안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전개하 였다. 48) 대한제국은 이미 망한데다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이 실시되자 경인지역 의병들 도 뭔가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병장 강기동은 서울로 잠입 중 체포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한 바 있었다. 49)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로 올라간 까닭 은 아마도 국내외 정세를 직접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추측된다. 1911년 2월 의병 장 강기동은 북간도로 망명하기 위해 원산에 머무르다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50) 이로써 경기도의 의병항쟁은 종식되었다. 이와 같이 1910년 8월 일제의 조선강점으로 의병항쟁은 새로운 전환점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으로 전환하든지, 아니면 국내에서 다른 형태의 민족운동을 모색해야 할 상황에 직면 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양평지역 후기의병은 전기의병에 비해 그 실체가 거의 밝혀진 바가 없었다. 전기의병이 화서학파의 문인들에 의해 강력히 진행되었다면, 후기의병은 평민층이나 해산 군인들이 주도한 점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양평지역의 후기의병은 처음에는 강력한 투쟁 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과 13도창의대진소의 해산으로 말미암아 점차 위축되어갔다. 양평의병의 공격대상은 일제 군경과 친일세력뿐만 아니라 침략기구인 수비대와 경찰기 관, 그리고 세무서⦁우편취급소⦁관아 등이었다. 의병들은 국권을 회복하고 주민들의 생 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일제의 군경을 비롯한 침략기관, 그리고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 을 구축⦁처단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밀려 이들의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항일의지는 독립군으로 계승됨으로써 차후 민족해방운 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大韓每日申報≫∙≪皇城新聞≫∙≪獨立新聞≫(상해판)∙≪每日申報≫. 『暴徒에 關한 編冊』, 『한국독립운동사』 1∙ 자료 8~19, 국사편찬위원회, 1965~1990. 內部 警務局 편, 『暴徒史編輯資料』, 1909 ;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朝鮮駐箚軍司令部 편, 『朝鮮暴徒討伐誌』, 1913 ;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48) 김순덕, 앞의 논문, 201쪽. 49) 황현, 『매천야록』 권6(隆熙 4년 庚戌), 국사편찬위원회, 1955, 535쪽. 50) 『每日申報』 1911년 2월 15일자 「賊魁姜基東就縳」, 4월 19일자 「姜基東의 砲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