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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 병 1개 분대를 부여함)는 24~5일 양일간에 양근 동북쪽 약 20리에 있는 장수동에 서 연안막⦁상원사⦁용문사⦁용문동⦁麻洞⦁雲峴(용문산 남쪽 기슭)⦁廣灘에 이르 는 지구에 대한 소탕을 감행하여 적어도 폭도 50명을 죽였으며, 적의 근거지인 상원사 및 용문사는 집적해 있던 다량의 양식과 함께 불태웠음(『한말의병자료』Ⅳ, 선인, 58쪽) 1907년 중반 양평지역을 중심으로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이 전개됨으로써 의병의 피해 뿐만 아니라 사찰까지 피해가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1 참조). 한편, 일제는 회유책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 의병이 歸順政策을 실시하여 귀순 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3월 양근군에서는 108명의 귀순자가 발생하고 있 으며, 42) 같은 해 10월말까지 양근에서 227명, 지평에서 42명의 귀순자가 발생하였다. 43) 42) 『한국독립운동사』8, 국사편찬위원회, 399~343쪽. 43) 『한국독립운동사』12, 국사편찬위원회, 708⦁711쪽. <그림 1> 일본군의 양평의병 탄압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