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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 이하의 男女를 勒會하려 한다. 그 凶慘 陰毒의 景狀의 將次 何境에 在함을 알 바 가 없다. 凡 我郡內의 丁壯은 하나도 遺漏없이 各 一木椎를 持하고 早食後大垈 에 齊會하여서 不虞를 막아 後日의 懲을 삼기를 要한다. 戊申 음 2월 일(『한국독 립운동사』10, 134쪽). 일제와 행정기관 그리고 자위단이 시행하는 종두를 거부하기 위한 집회를 촉구하는 내용 이다. 일제는 이러한 격문이나 통문을 김춘수 의병부대에서 유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40) 아마도 이러한 의병의 권유 및 군수품의 징발과 보관 등은 아마도 13도창의대진소의 양 평 주둔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1908년 2월경에 이러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전달된 점에 서 그러하다. 이상과 같이 1907년 7~8월 이후 양평의병은 일시에 봉기하여 일제의 구축과 친일세력의 처단에 앞장 섰다. 이들은 일본 수비대와 경찰 또는 일제의 침략기구인 우편취급소⦁관아 ⦁세무서 등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친일군수와 일제의 앞잡이인 일진회원의 처단에 힘을 기울였다. 양평의병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대체로 평민층이거나 해산군인들이 많았으며, 일반 의병 역시 해산군인과 포수들이 상당수를 차지함으로써 이들이 의병투쟁 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13도연합의병을 결성할 때에는 대부분 合陳함으로써 반일투쟁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양평을 비롯한 경기지역 일부에서는 일 시적으로 행정이 마비되거나 행정기관이 폐쇄될 정도로 의병의 활동이 강력하였다. 이에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대폭 증강시켜 수시로 진압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의병의 진압 에 온힘을 기울였다. 일제는 ‘토벌’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의병의 근거지는 물 론 의병에게 물자를 지원하거나 협조한 마을 및 주민들을 잔혹하게 죽이거나 방화하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당시 양근 읍내 마을에 불을 질러 1천여 호가 불탔 으며, 상원사와 용문사 등 전통을 자랑하는 古刹 등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41) 다음의 인용문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양근 동북 약 20리에 있는 폭도의 소굴인 장수동 연안막을 습격, 궤란하는 폭도 를 추격하여 용문사 근거지를 무찔러 장래의 화근을 끊기 위하여 그것을 소각해 버렸다. 폭도는 사상 50을 유기하고 산란하였다(「조선폭도토벌지」, 692쪽). (1907. 8월) 양근 방면에 있는 적의 토벌에 나섰던 보병 제52연대의 제9중대(공 40) 『한국독립운동사』10, 142~143쪽. 41)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5일자「民戶沒燒」9월 10일자「慘不忍見」⦁10월 1일자 「지방정형」⦁10월 8일자 「陽邑又燒」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