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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지평⦁양근⦁여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35) 김현규는 1907년 음력 8월 이강년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활동한 바 있었으나, 1908년 중반에 이르러 일제는 그를 소재 불명으로 파악하 고 있다. 김현벽은 1908년 2월초 일제에 귀순하고 말았다. 關東兵營將 丁大武가 지평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음력 정월 부대를 해산하고 귀순하자, 그 부대의 선봉장 金 應西가 독립하여 활동하던 중 13도 연합의병에 참여하였다. 36) 그러나 1908년 3월 중순 그는 지평으로 귀가하여 잠복 중 체포되었다가 일제 헌병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한편,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크게 고조되자, 의병의 지도부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일제에 총공세를 펼침과 동시에 한국문제를 국제화하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였다. 1907 년 12월 楊州에서 결성된 十三道倡義大陳所 37) 가 그것으로, 이른바 ‘13도 연합의병’을 성 사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원주 출신의 李殷瓚과 서울 출신의 李求采 등이다. 38) 이들은 경 북 聞慶에서 은둔하던 신망 높은 유학자 李麟榮을 찾아가 창의하자고 설득하여 동의를 얻었다. 1907년 음력 8월 이들은 원주에서 關東倡義大將所를 결성하여 수천 명의 의병을 모은 후 양주를 서울 공격의 근거지로 삼고자 먼저 지평으로 이동하였다. 1907년 10월 20일경 의병장 이인영은 확대 개편된 의병 조직 약 2천 명을 이끌고 당시 지평군 上東面 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지평에서 약 한달동안 머물며 군수물자의 조달과 병력을 보강하였 다. 그리하여 이들은 16개 단위부대에 총 8천여 명으로 증강⦁개편되었다. 이들은 일제 군경과 세 차례의 지평 교전을 통하여 자신감을 얻은 후 양주로 진군하였 다. 당시 양주에는 48개 의병부대에 약 1만여 명의 의병부대가 속속 도착하였다. 당시 양 주에는 48개 의병부대에 약 1만여 명의 의병부대가 속속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이인영은 13도창의총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軍師將에는 허위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등으로 13도창의대진소의 편제가 짜여졌다. 이들은 대체로 이인영이 이끄는 관동창의진과 허위가 지휘하는 의병부대를 주력으로 연합한 의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병지도부의 계획이 치밀하지 못한데다 전술의 미숙, 그리고 총대장 이 인영의 父親喪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한편, 양평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주민들에게 의병을 권유하기도 하고, 군수품을 조달 받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차압한 군용품을 주민들에게 보관시키기도 하였다. 아래의 인용 문이 그러한 상황의 일단을 알려준다. 35) 「폭도사편집자료」, 507~509쪽 ; 김순덕, 앞의 논문. 36)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14일자 「義兵情形」및『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17~118쪽. 37) 13道倡義大陳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는 다음의 논문을 들 수 있다. 愼鏞廈, 「全國 ‘十三道大陳所’의 聯合義兵運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7. 吳瑛燮, 「韓末 13道倡義大將 李麟榮의 生涯와 活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19, 2002. 38) 13도창의대진소에 관한 내용은 김순덕의 앞의 논문, 70~83쪽을 참고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