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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18일 그는 서울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28) 한편, 조인환은 1907년 9월말이후로 행적이 불 분명하다. 다만, 그가 1909년 12월경까지 의병으로 활동하던 중 부하들과 대립하다가 살 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29) 그리고 김춘수는 강원도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부하 200명을 이끌고 양평을 비롯 한 광주⦁가평⦁홍천 등 경기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그는 13도연합의병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인 1908년 1월 17일 부하 수십 명과 강원도 홍천에 잠복 중 일본군 의 기습공격을 받아 부하 12명을 잃었다. 30) 하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재기하여 같은 달 하순 양근군 北上面에서 부하 李延秊이 체포된 책임을 물어 친일만 李黃俊을 응징하 였다. 1908년 4월 그는 부하 7~80명을 이끌고 가평⦁양주⦁홍천 등지에서 방곡령을 지시 하는 한편, 각 면장과 동장들에게 군수품의 조달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주로 화약이나 火 繩 및 탄환, 또는 짚신이나 식량 등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의병의 재거와 청국의 참여 로 한국이 국권을 회복할 것이므로 의기 있는 자는 의병에 투신할 것과 자위단장을 참살 하겠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의병장 김춘수는 의병 귀순자 3명을 처단하는 등 의병투쟁 을 이끌다가 1908년 4월 가평군에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탈옥해서 다시 활동하 다가 1909년 12월 자수하였다. 31) 또한 이연년은 1907년 7월 김춘수의 從書로 투신했다가 독립하여 주로 여주와 홍천 등 지에서 활약하던 중 13도 연합의병 편성시 이강년 의병부대에 편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8년 3월 귀가했다가 체포되어 10년 유배형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와 상 반된 자료도 있으므로 그의 행적을 정확히 밝히기 어려운 실정이다. 32) 한편, 최태평은 부하 300명을 인솔하고서 양평을 주요 활동무대로 삼아 인근 지역을 넘 나들며 활동했다. 그는 1907년 8월경 서울을 습격할 목적으로 남종면에서 일본군과 격전 을 치르기도 하였다. 최태평은 그해 12월 하순 의병항쟁을 포기하고 투항했으나, 1910년 1월 군자금 모집을 한 것으로 보아 다시 의병에 투신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33) 이밖에도 군대해산 시 正尉였던 權仲植은 양근을 근거지로 삼아 해산군인들과 山砲들로 구성된 의병을 조직하였다. 34) 그는 경기관찰사에게 수원 龍珠寺로 군수품을 보내라는 격 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金玄奎(賢奎)와 金賢壁은 각각 250여 명과 100명을 이끌고 28) 《황성신문》 1908년 6월 26일자 「偶捉兩魁」. 29) 『暴徒에 관한 編冊』, 「首魁 曺仁煥에 관한 건」(1910.3.7) ; 『韓國獨立運動史』17, 국사편찬위원회 , 376~377쪽. 30) 《황성신문》 1908년 1월 30일자 「地方消息一通」 및 김순덕, 앞의 논문, 41~42쪽. 31) 김순덕, 앞의 논문. 32) 《황성신문》1908년 3월 10일자 「義兵被捉」 및 「폭도사편집자료」, 509쪽 ; 김순덕, 앞의 논문, 42쪽의 각 주 176 참조. 33) 『폭도에 관한 편책』, 1910년 1월 6일자 및 1월 26일자 ;『한국독립운동사』17, 2⦁16~17쪽 참조. 34) 뒤바보,「義兵傳」 『獨立新聞』 1920년 5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