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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환⦁라응완은 일제에 의해 발각, 체포되어 각각 10년⦁7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의 양근과 지평, 즉 양평에서 의병의 활동이 거세어지자, 일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250명 규모의 일본군을 파견하였으며, 이어 증원병을 추가로 파병하였다. 이에 맞선 조인환 의병부대는 양근 인근의 산 속에 매복해 있다가 일제의 진압 경찰을 공격, 격퇴하 였다. 이들은 또한 양근 방면의 진압에 나선 일본군을 따돌렸다. 일제의 진압 군경은 양 근의 長壽洞 連安幕을 습격한 후 상원사⦁용문사에 비치한 의병의 군량과 군수물자를 찾 아내어 불태워 버렸다. 23) 뿐만 아니라 일제는 양근읍내 민가 수백 호를 불태우고 지평의 龍門洞의 기독교인 가옥 14호와 평민 가옥 6호를 소각하였다. 24) 주민들이 의병에 협조해 준 것에 대한 일제의 잔혹한 보복조치로 믿어진다. 8월말 일제 진압군의 추격을 받던 조 인환 의병부대 200여 명은 양근의 廣灘 부근 산중에 매복해 있다가 역습을 감행하여 상 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거듭된 진압작전으로 말미암아 의병의 피해가 커지자, 조인환 의병부대를 비롯한 양평의병들은 양주를 비롯한 경기⦁강원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25) 한편, 1907년 9월 초순 조인환 의병부대가 京元⦁京義 街道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 자, 일제는 보병 제52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제 의 ‘토벌’ 계획을 눈치 챈 조인환 의병부대는 진압부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적절하게 대처 하거나, 때로는 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양근의 分院洞에서 격전을 치르다가 9월 17일 20여 명의 부하를 잃기도 하였다. 26) 분원동전투 이후 의병장 조인환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의 의병부대를 이 탈하였다. 그러자 의병들은 해산군인 출신의 申昌鉉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원래 이천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金鳳基의 부하였으나, 패전 후 양근으로 이동하여 조인환의 부 하가 되었다. 1907년 9월 하순 부대를 정비한 의병장 신창현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의 1개 소대를 습격하여 이틀에 걸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 측의 3면 공 격을 받아 의병 27명이 전사하는 큰 타격을 받았다. 10월경 신창현 등 의병 300여 명은 양근⦁광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강원도 인제로 이동하여 민긍호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13도 연합의진에 참여하였다. 27) 그 후에도 그는 강원도에서 李求采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일본 군경과 10여 차례나 교전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인 1908년 6월 22)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6일자 「兩囚處判」. 23)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9일자 「無處不義」 및 朝鮮駐箚軍司令部 편, 「朝鮮暴徒討伐誌」, 1913 ; 『독 립운동사자료집』3, 1971, 692쪽. 24)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6일자 「地方情形」. 25) 「조선폭도토벌지」, 692⦁699~700쪽. 26)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2일자 「地方消息」. 27)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의병항쟁재판기록), 1974, 68~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