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page

426 는 의병부대가 양평을 활동영역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이문호를 제외하고 는 대부분 양평 출신이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양평이 지리적⦁교통상의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 때문에 그들이 활동무대로 삼지 않았나 한다. 이들 가운데 구만서가 이끄는 의병부대 50여 명은 1905년 6월 7일 새벽 砥平郡 一進會 사무소를 습격하였다. 9) 이들은 일진회 지회장 李康壽를 비롯한 부회장⦁회원 등 7명을 포살하는 한편, 일진회원 2명을 붙잡아 의병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6월 9일에 이들은 楊根郡 일진회 사무소도 공격하였으나, 이미 일진회원들이 도망한 후였다. 이들은 양근읍 의 객주가를 습격하여 군수전을 징발한 후 원주로 떠났으며, 이문호 의병부대는 1905년 6월 지평에서 봉기하여 13도에 통문을 보내며 창의를 촉구하였다. 10) 그리고 지평출신 孟 日浩가 일진회원의 처단에 나선 사실도 확인된다. 11) 한편, 이범수 의병부대가 세력을 떨 치자 군부에서는 1개 소대를 파견하여 진압케 하였으며, 심상희 의병부대는 여주에서 창 의하여 양평을 활동구역의 하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양평지역 의병들이 일진회 사무소를 공격하여 일진회원들을 처단하자, 일진회 본부는 자구책을 강구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정부에서도 軍部로 하여금 군대를 파견하여 구만서 의병부대의 진압에 나서도록 하였으며, 內部는 그 책임을 물어 양근군수 李範奭과 지평군수 李誓鎬를 각각 파면하였다. 12) 요컨대, 양평지역 후기의병의 발단은 1904~1905년을 전후한 일제의 정치적 침탈에서 찾 아진다. 이들은 친일세력으로 급부상한 일진회의 타도와 일제의 구축에 목표를 둔 보국안 민적 의병활동을 지향하였다. 하지만 전투력의 제고와 전술적인 뒷받침이 미흡한 때문에 의병항쟁이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3. 양평지역 후기의병의 발전(1907. 8~1908)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며칠 뒤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다. 또한 일제는 8월 1일 유명무실한 군 대마저 해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의병이 봉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제 역시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및 군대해산으로 인하여 排 한 이들과는 달리 1907년 7~8월경에 창의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9) 《황성신문》 1905년 6월 14일자「楊根匪優」및 6월 19일자 「砲殺詳報」. 10) 위의 신문 1905년 6월 19일자 「義兵檄文」 11) 《대한매일신보》 1905년 1월 14일자 및 같은 해 2월 2일자 ; 김순덕, 앞의 논문, 19쪽 각주 62 참조. 12) 《황성신문》 1905년 7월 1일자 「兩倅拿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