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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이범직 등 화서학파 문인을 비롯하여 의병이 합세하였다. 제천군수는 도주하였으며 의 진에서는 대장에 이필희를, 군사에 서상렬을 추대하고 이춘영은 중군장, 안승우는 군중도 유사, 김백선은 선봉장을 맡았다. 지평의병은 1월 19일 단양의 장회협 전투에서 친위대 1개 중대와의 첫 전투를 수행하였 다. 이 전투는 서상렬과 김백선이 거느린 포군이 추격해 온 관군을 장회협의 협곡에서 매 복해 있다가 급습하여 승리한 전술의 승리였다. 이 전투 후에 지평의병은 관군과 일본군 의 재공격에 대비하고자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류인석은 이정규 등 제자들을 각지에 보내 흩어진 의병을 영월로 집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영월에는 지평의병 외에도 단양의병, 안승우와 신지수가 모집한 의병, 류인석의 문 인들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류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지평의병은 류인석 이 지휘하는 새로운 의병의 기간으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우선, 지평의병은 전기의병의 대표적인 척사의병이다. 지평의병은 갑오변란과 을미사변, 변복령과 단발령 공포, 그리고 청일전쟁의 발발과 같은 정치사회적인 요인으로 봉기하였 으며, 동시에 화서학파의 철저한 華夷論에 기반하였다. 지평의병은 인근지역의 의병봉기에 큰 영향을 끼친 점에서 의의가 크다. 경기지방에서 봉기한 지평의병은 강원지방, 이어서 충북지방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갔다. 그 결과 춘천과 단양에서 의병 봉기가 준비되었다. 특히 단양에서는 의병이 도착하자 횃불을 들고 환영하였으며 장충식을 비롯한 단양의병이 합류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지평의병의 활동은 요동지방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던 류인석으로 하여금 상복을 벗고 의병장의 중책을 맡게 하였다. 류인석이 이끈 제천의병의 전과와 파 급 효과로 보아 이러한 점에서 지평의병의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지평의병은 이필희⦁이춘영⦁안승우 등의 지휘부와 김백선의 포군 간에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한계도 발견된다. 장회협 승전이후 포군들이 대장인 이필희를 기피했던 사건도 일어났다. 그 결과 갑자기 부대가 와해되는 사태가 있기도 했다. 이는 지평의병의 지휘부와 구성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