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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라고 거의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요동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삼년상을 치를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더욱이 상주 노릇 하는 것과 先王의 大道를 지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중요 하냐는 제자들의 사리가 분명하고 거침없는 질정에 류인석은 대장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류인석은 ‘復讐保形’의 기를 높이 세우고 영월성 문루에서 대장직에 올랐다. 이어서 재 능에 따라 여러 장수들에게 각각의 책임을 맡겼는데 지평의병의 이춘영⦁안승우⦁김백선 이 각각 중군장⦁전군장⦁선봉장에 임명되고, 신지수를 후군장, 원규상을 좌군장, 안성해 를 우군장, 박주순을 참모, 장충식을 司客, 이조승⦁홍선표⦁이기진⦁정화용을 종사에 임 명하였다. 류인석은 문루에서 이들로부터 군례를 받고 군사를 사열하였다. 68) 그 자리에는 지평의병 세력을 비롯하여 화서학파 문인들, 그리고 長忠植 등 단양에서 들어온 의병, 申 芝洙가 네 고을에서 모집한 의병 69) , 그리고 관동 일대에서 안승우가 모집한 의병들이 운 집하여 있었다. 70) 이제 지평의병은 류인석이 지휘하는 새로운 의병부대의 기간으로써 활 약하게 되었다. 류인석은 같은 날 밤에 정탐군으로 의병의 질서를 와해시키고자 했던 李 敏玉⦁崔進士⦁趙先達⦁辛二白 등을 처형하여 군기를 엄정히 하였다. 동시에 각지에 격 문을 발표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2월 11일(음, 12월 28일) 제천으로 본진을 이진하 였다. 71) 4. 맺음말 1895년 11월 단발령의 공포 후에 이춘영⦁안승우 등 지평 출신의 화서학파의 문인 및 김백선과 그 추종 세력은 이를 국가의 위기로 인식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지평의병은 1896년 1월 12일 원주의 안창에서 거의하여 원주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때의 의병의 수는 1천여 명에 달했다. 1월 17일에는 제천관아를 점령하였다. 제천 일대에서 서상렬⦁이필희 68)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책 366쪽, 이정규, 「종의록」, 위의 책, 23쪽. 안성해의 경우에는 「종의록」에서는 조련장으로,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에서는 우군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69) 이정규, 「종의록」, 위의 책, 22쪽. 70)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의 책 364쪽. 이에 의하면, “방림에 돌아와서는 군사 수백 명이 집합 되어 지평에서 일으켰던 군사에 비할 만하였다”라고 안승우가 수백 명을 새로 모병했음을 알려준다. 71) 박정수,「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의 책 367~368쪽. 이에 의하면, “12월 27일 제천으로 향하여 가다가 瓮山村에서 자고 갑오일(12월 28일)에 제천으로 들어 갔다”라 하여 류인석이 12월 28일(양, 2월 11일) 아침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류인석이 이때 발표한 격 문은 주용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檄告八道列邑」이다. 이 격문은 『호서의병사적』에서는 「檄告八城」이라 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내용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