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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 사시말』은 다음과 같이 자세히 알려준다. (춘영이) 쳑수(隻手)로 지팡이 짚고 곳 안창을 가 그 악부(岳父) 김도사(金都事) 응수의 집에 가 그 온 뜻즐 말하고 또 젼곡을 내여 군수(軍需)의 쓸 일을 말하니 응수가 또한 재산을 모와 쓸 줄을 아니 가히 뜻이 잇는 사람이로다. 개연(蓋然)히 대경대희(大慶大喜)하여 왈, “아서(我婿)가 과연 이러한 큰 뜻이 있더냐”, 이예 만 수암의 드러가 소를 잡고 술을 거르고 가마를 굽고 밥을 지여 호군지물(犒軍之物) 을 안배하고 기다리더니, 백슨(伯先)이 과연 그날 군사를 거느리고 왓는지라. 춘영 이 이예 장대를 세워 긔를 삼고 칼을 집고 단의 올라 맹세를 짓고 무리를 경계하 여 그 절제를 밧게 하고 호령을 한번 내리매 개개(箇箇)이 손벽을 쳐 의를 품은 장사라. 천지가 감림(監臨)하고 귀신이 재방하니 과연 천하만고의 무등한 승거가 아니냐. 22) (괄호 안 한자는 필자가 입력한 것임)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춘영은 장인인 도사 김헌수와 미리 연락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김헌수는 미리 음식과 재물을 준비하고 의병 봉기에 적극적인 지원을 한 것이 다. 23) 안승우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류인석의 부름을 받고 제천의 장담에서 대책을 논의 하던 중이었다. 그러한 중에 이춘영의 거병을 알리는 서신은 그의 뜻을 더욱 분명히 하기 에 충분하였다.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에 의하면, “11월 갑자일(28일을 말함, 양력으로는 1월 12일, 필 자)에 공(안승우, 필자)이 이춘영과 함께 지평 고을 군사들로써 창의의 깃발을 원주 땅 안 창에 들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안승우가 합류한 후인 1월 12일(음, 11월 28일) 이춘영 김백선과 함께 창의를 선포한 것으로 보이다. 24) 안승우는 이때 “李範稷 元徹常 申芝洙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밤중에 길을 바삐 걸어” 25) 라고 한 것으로 보아 李範稷(1868 ~ 22) 『의병사시말』 23) 「의병사시말」에는 이춘영의 장인이 김응수라고 적고 있는데, 족보에 의하면, 金憲秀로 나와 있다. 만수암 의 위치는 확인이 안 된다. 다만, 김헌수의 집은 안창에 있는 그 후손 김세영씨로부터 그 집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03년 9월 29일). 만수암 역시 그 일대로 추정된다. 「종의록」(18~19쪽)에 의하면, 안승우가 판서 金世基에게 연락을 취하여 군사를 먹일 것을 준비하게 하고 만나자고 했는데 김세기는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 김세기와 심상훈 연명의 창의격문이 공개되 었으나(김성근, 「원주창의소와 이강년 격문을 통해 본 제천의병운동사」 『제천의병의 문헌적 검토』, 2003 년 10월 10일, 세명대), 이들이 의병을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증명할 다른 자료가 나오기 전까 지는 유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4) 지평의병의 봉기일은 11월 28일(음)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춘영이 김백선에게 11월 26일 거사하기 로 한 바 있으나, 이때는 안승우가 도착하지 않은 때였다. 「육의사열전의 이공괴은전」에는 11월 29일 거 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하루의 차이가 있으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의 기록을 따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