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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1) 안승우는 일본의 침략에 직면하자 즉각적인 거의의 태도를 취하였다. 1894년 여름 일본 군이 경상도 지역을 거쳐 서울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7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이에 대 항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이 모병이 의병투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를 통해 그의 대일항전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12) 그는 류인석의 처변삼사의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가장 적의한 방법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니, 만약 하늘의 재앙을 뉘우친다면 이 도를 붙잡을 수 있고 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며, 만일 이렇게 되지 못하더 라도 역시 大義의 소리를 떨쳐 만세로 하여금 대의가 어디 있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承禹 제가 비록 못생겼지만 삼가 뜻있는 이들과 더불어 명령을 받들어 계획해 보겠습니다. 13) 한편, 이때 여주의 曲水에서 우거하다가 단발령의 소문을 들은 李春永(1869~1896. 2. 26, 자 : 友三, 호 : 槐)隱, 본 : 德水)은 고향인 지평으로 가서 선배인 안승우의 집에 갔 다. 이춘영은 류중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으나 그의 척사문을 성복하면 서 존경하였으며 華門으로 고향 선배인 안승우를 대할 때마다 ‘夷獸의 禍’에 대비할 방책 을 논하곤 했다. 14) 11) 李正奎, 「下沙安公遺事」 『恒齋集』권16, 遺事. 12)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독립운동사자료집』1, 350~351쪽). “갑오년 6월에 公(안승우필자주)이 門人 洪思九와 함께 제천 白蓮寺에서 避署하고 있었다. 그달 25일 밤 에 흉적 朴泳孝⦁徐光範⦁徐載弼이 왜인을 이끌고 밖에서 들어와 金弘集⦁魚允中⦁兪吉濬⦁趙羲淵⦁金嘉 鎭⦁李允用⦁李完用⦁朴定陽과 내응, 경각의 사이에 적병이 대궐 안에 밀어닥쳤다. 임금을 협박하고 옛 제도를 모조리 배척하여 위로 종묘제향과 조정 관제, 아래로 인민의 의복과 행사까지 한결같이 오랑캐의 습속을 따르게 하였다, 公이 듣고 통곡하며 산에서 내려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호응하는 자 가 없었다.” 13) 이정규, 「육의사열전, 안하사전」『독립운동사자료집』1, 190~191쪽. 李正奎의 「重義錄」(獨立運動史資料集, 1, 17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지팡이 끝에 기를 달고 적을 꾸짖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으며, 그것은 또한 후세에 대의를 펼 수도 있는 것이다.” 14) 『의병사시말』에 의하면, 단발령이 내림을 보고 이춘영은 다음과 같이 절의를 지킬 것이라며 안승우와 더 불어 말했다 한다. “지평 사람 이춘영이 대개 약관 적부터 흉금이 뇌락하고 지기가 호매하고 여력이 또한 다인한지라. 국가 에 이적의 화가 승시하여 소중화 옛 지경을 척축하여 먼저 복색을 고쳐 검은 걸 숭상하는 영으로써 시험 하는 걸 보고 그윽히 노연이 바다에 뛰어드는 절의를 사모하여 일직이 그 동네 사람 안승우로 더불어 서 로 말하여 가로대, 형상을 변하는 날은 곳 우리배 죽는 날이라. 늑삭하는 칼이 만일 우리배 머리에 밋친 즉 마땅히 위태로이 안저 크게 꾸짖고 그 흉한 칼날을 받아 스스로 정절에 도라감이 엇지 상쾌하지 아니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