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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3. 지평의병의 결성과 활동 1) 의진의 결성 1894년 6월의 갑오변란 후 부일개화파들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어 ‘更張’이란 이름하에 일련의 개화정책이 펼쳐졌다. 정치 경제의 개혁은 물론 복제까지 변개하자 유생들은 “당 당한 예의의 나라 소중화가 하루아침에 소일본으로 변하였다.”고 개탄하였다. 1895년 3월 칙령 제67호로 공포된 을미변복령(일명 黑色令)에 의해 복색마저 흑색으로 변하게 되자 유생들은 이를 곧 ‘오랑캐화’로 인식하여 조선의 자주성을 해치는 문화망국 행위로 파악 하였다. 지방 유생들의 이에 대한 반발은 거세었으니 류인석이 을미변복령 공포 후 “4천년 華夏 正脈과 2천년 孔孟大道와 조선 5백년 禮樂典刑과 家家數十世慣常法度가 여기서 단절되 었다.” 8) 라고 단정하고 있음은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구 제국주의 세 력의 동점하에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영합한 개화파 관리들에 의한 일련의 개화정책 을 망국행위로 단정한 보수유림들은 대응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호좌 유림의 대표로 華西-重菴-省齋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도맥을 승계한 류인석은 제자들에 게 향음례를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9) 그리하여 5월 15일(음) 제천 장담의 장담서사에서 향음례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정규의 「從義錄」에 의하면 이때 각처에서 모인 자가 5~6백 명에 달했다 한다. 5월 16일 대강례를 거행하는데 마침 관리가 새로 제정한 문패 와 명령장을 갖고 오자 이를 찢고 불태웠다 10) 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서 11월에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류인석은 문인 들을 제천의 장담에 소집하였다. 류인석은 “장수란 戰鼓 아래 죽고, 마부란 말고삐 아래 죽는 것이니, 先王의 道를 지키다 죽는 것이 선비의 常事다”라고 말하고 변란에 처하여 3가지 방책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蹈海’, ‘自靖’, ‘擧義’의 處變三事이다. 류인 석은 상중임으로 ‘蹈海’의 길을 택하고 제자들에게 각자 태도를 정하라고 하였다. 이때 안승우는 ‘擧義’의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安承禹(1865~1896, 호 下沙, 자 啓賢, 본 順興)는 지평출신으로 이항로의 문인인 이근원과 류중교로부터 학업을 닦았다. 그 중 에서도 그는 특히 류중교로부터 화서학파의 핵심사상인 화이론을 전수받고 그의 영향을 8) 柳麟錫, 「乙未毁服時立言」『昭義新編』卷4, 132~133쪽. 9) 李正奎, 앞의 책, 16쪽 10) 李正奎, 앞의 책, 16~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