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page

401 5. 맺음말 양평지역 의병의 중심세력은 화서학파의 성원들이었다. 특히 류중교 문하의 류인석을 비 롯하여 이필희⦁이춘영⦁안승우⦁서상렬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 상은 조선 말기 위정척사, 존화양이의 연원이자 거두인 화서 이항로가 양평 벽계에서 일 생동안 강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양평 일대에는 자연히 많은 문인들이 배출 되고 자연히 폭넓은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는 데 기인한다. 또한 화서 사후에는 성재 류중 교 문하의 발군의 인물이었던 금계 이근원이 지평에서 강학을 함으로써 양평 일대의 화서 학파의 구심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화서학파의 학문적⦁사상적 내용과 특성은 양평의 병의 이념적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화서학파와 양평의병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를 설정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화서학파는 한말의 여러 성리학 문파 가운데서도 특히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철저하 였던 학파였다. 이 문파에서 金科玉條로 여겼던 尊華攘夷論은 바로 이러한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론의 소산이었다. 이근원을 비롯한 화서문파의 인물들이 가평의 朝宗巖과 여 주의 大老祠를를 聖地로 여겼던 것도 이곳이 바로 의리와 명분의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화서학파가 견지하였던 이와 같은 존화양이사상은 사변적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의병투 쟁 전개과정에서 철저하게 실천되고 동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침략에 직면한 민 족적 위기상황에서 華脈과 道學의 보존문제는 곧 화서학파 인물들에게는 필생의 과업으 로 제시된 것이다. 이러한 화맥과 도학 속에는 곧 국가와 민족의 실체가 내적으로 형상화 되어 있었고, 이러한 점에서 의병을 비롯한 화서학파의 항일투쟁 논리가 결코 맹목적 모 화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보존⦁수호 논리와 직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양평의병은 이러한 화서학파의 학문적⦁사상적 특성이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외적으로 표 출된 경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투쟁의 강도 면에서나 장기 지속성의 면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투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