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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 學을 견지하고 있던 이근원도 이와 같은 혼란한 시국상에 큰 충격을 받았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이 시기의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던 화서문파의 성원으로서 운동대열 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는 등 그 충격과 영향은 남달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 시기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던 화서문파의 성원으로서 운동대열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는 등 그 충격과 영향은 남달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근원이 漢浦書社에서 스승 류중교로부터 尊 華攘夷의 의리를 들었던 것도, 金永祿과 함께 의리와 명분의 본산으로서의 『朝宗巖誌』를 편찬한 것도 모두 이 무렵의 일로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근원은 화이론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경향성은 일제의 침략이 강화되는 1890년대 이후로 갈수록 더욱 심화된다. 화이론에 입각한 이근원의 의식의 일단이 가장 잘 투영된 대표적인 문건이 「華夷衣服 辨」이다. 그는 여기서 조선 전래의 의복제도의 중요성과 그 당위성에 대해서 존화양이론 의 관점에서 역설하고 있다. 곧 그는 명이 청에게 망한 이후 천하에서 유일하고도 당당한 소중화의 조선이 인류문명의 절대적인 가치를 보전하고 있는 현실에서 변복령이 내려짐으 로써 華脈이 일시에 陷溺된 것으로, 즉 인류문명이 단절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는 것 이다. 42) 이근원은 적어도 외형상 자주 주권국임을 천명한 대한제국 국호와 建陽 연호, 곧 稱帝建 元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 황해도 평산 의 동문사우 訒齋 申錫元에게 보낸 서신 別紙에서 이근원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혹 大君主 세 글자의 호칭은 난적이 억지로 붙인 것이라 무릇 신 민 된 자는 모두 어기어 따르지 않아야 하는 의리가 있다고 여겼으며, 지금의 稱 帝建元은 천하만국과 함께 하는 호칭이니 어찌 쫓아서 받들지 않겠는가고 여긴다. 이것은 크게 그렇지 않다. 지금의 칭제는 단지 전날의 이른바 대군주에 조금 윤색 을 가한 것일 따름이다. 대저 일이 명분과 의리를 지키는 데 관계된다면 임금의 명이라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물며 지금 황제 칭호는 진실로 여러 이적들의 欺 瞞과 誣告로 이루어졌기에, 그 이름은 비록 임금을 받드는 듯하지만, 사실인즉 임 금을 크게 욕되게 하는 것이다. 43) 42) 「華夷衣服辨」『錦溪集』권17, 잡저, 10~12쪽. 43) 「答申德善別紙」『錦溪集』권7,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