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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 라 하였으며 전주가 본관이다. 성종의 제11자 全城君 忭의 11세 손이며 임진왜란 때 선 조를 의주까지 모신 扈聖功臣 가운데 한 사람인 靈山君 禮胤의 8세손이 된다. 그의 6대 조가 원래 세거지이던 양주를 떠나 지평 平章으로 이거한 뒤, 그의 부친 대의 錦里로 옮 아왔다. 28) 이근원이 화서의 문하에 처음 입문하게 되는 것은 대외위기의식이 극도로 고조되던 병인 양요 발발 직전인 1866년 4월,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성 재 류중교의 강학 서사인 가평 漢浦書社로 가 성재를 상면하게 된다. 그리고 중암 김평묵 의 문하에도 나아갔다. 이때부터 이근원은 화서의 양대 제자인 김평묵과 류중교 양 선생 의 문하를 출입하고, 최익현⦁류인석⦁류중악 등 화서 문하의 명사들과 깊이 교유하면서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尊華攘夷論을 근간으로 하는 화서학파의 학문에 깊이 경도되어 갔다. 29) 이로써 그는 일생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근원은 화서 문하에 들어온 뒤 그 동안 전심해 오던 과거 공부를 전폐하고 도학 공부 에 심력을 기울이게 된다. 1869년 4월에는 화서가 강학하던 蘗溪로 가 화서에게 제를 올 린 뒤 大谷의 김평묵 30) 을 뵙고, 류중교의 한포서사 강회에도 참석하였다. 이근원은 화서 이하 중암과 성재 등 화서학파 일문이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있던 춘추대 의적 존화양이의 상징물인 가평의 朝宗巖에 대해서도 역시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31) 그 는 1875년 동문 充齋 金永祿(1845~1900)과 함께 『朝宗巖誌』를 직접 교정하였으며, 1876 년 4월에는 동문 心齋 魚允奭과 함께 조종암을 찾아 ‘皇壇’과 ‘九義士壇’에 참배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일생토록 이곳을 자주 출입하며 존화양이 정신을 더욱 강화시켜 갔다. 한편, 錦里의 정사 동쪽 작은 계곡 위에 5~6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널따란 바위를 일찍 이 중암이 이름하기를 ‘反招臺’라 하고, 그 부근의 폭포를 海山 李根壽가 ‘隱瀑’이라 불렀 는데, 반초대와 은폭에 대한 유래를 이때 기록하였다. 이후 반초대와 은폭은 이근원이 향 리에서 지내는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한 자연의 벗이 되었을 만큼 강한 애착을 보이게 된다. 32) 이근원이 일문을 이루게 되는 시기가 언제인지 자료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 28) 「年譜」『錦溪集』권18, 부록, 1쪽. 29) 「行將」『錦溪集』권18, 부록, 27쪽; 「年譜」『錦溪集』권18, 부록, 2쪽. “丙寅 正月住蘗溪拜華西 李 先生四月行贄見禮于華西先生 十月往漢浦拜省齋柳先生” 30) 김평묵은 1866년 무렵부터 한포 부근의 大谷에 거주하고 있었다. 류중교가 1866년에 외아들을 잃고 크게 상심한 김평묵을 ‘篤大谷’으로 초치해 강회를 함께 하는 등 그를 위무하였기 때문이다 (「年譜」 『省齋集』권58, 부록, 993쪽). 31) 溤榮燮. 編, 「發刊辭」『朝宗巖文獻錄』, 경문사, 1982, 9~11쪽 참조. 32) 「反招臺」⦁「隱瀑」『錦溪集』권2, 詩; 「隱瀑記」『錦溪集』권16, 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