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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 상투와 圓袂(전통의복)의 수호 여부에 따라 華夷와 人獸의 판단 여부 및 綱常大 道의 보존 여부가 달려 있으니 (중략) 머리는 만 번이라도 갈라질지언정 상투는 한 번도 잘릴 수 없고 몸은 만 번이라도 찢길지언정 원몌는 한 번도 찢길 수 없 다. 26) 여기서 상투와 원몌는 보존 여부에 따라 華夷 와 人獸의 결판이 난다고 하였으니, 환언 하면 이것은 개화와 수구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하겠다. 상투와 원몌가 문명과 사람을 상 징하고 수구와 자주를 의미한 데 비해, 삭발과 변복은 오랑캐와 짐승을 상징하고 개화와 예속을 의미한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볼 때, 화서학파 擧義 인물들은 존화양이론에 근저를 둔 화이인수론에 입각하 여 반제⦁반개화투쟁에 더욱 철저하게 되었으며, 화서학파의 항일투쟁의 지속성과 강도는 바로 이와 같은 이론적 무장의 소산이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 李根元의 생애와 尊華攘夷思想 이근원은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1918년 79세로 타계할 때까지 일생 동안 잠시도 고향 을 벗어나지 않고 한 곳에서 일생을 마친 도학자이다. 그는 양평을 중심으로 경기⦁강원 ⦁충청 3도 접경지대에서 강학을 통해 千洛龜⦁李奎顯⦁申益均⦁申右均⦁尹正學⦁朴峻 彬⦁朴廷和 등 많은 문인들을 양성함으로써 이 일대에 화서학파의 일문을 크게 번성시킨 首長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투쟁을 비롯하여 양평지역의 항일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27) 이근원은 헌종 6년(1840) 砥平縣 錦里에서 아버지 老稼堂 李養翕(1809~1878)과 어머니 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世元으로, 자를 文仲, 호를 錦溪 혹은 伓璞窩 26) 「贈言金仲一還國」『昭義新編』권3, 117쪽. “此一髻髮圓袂存不存之間 實華夷人獸之判不判 綱常大道之 保 不保有在焉 (中略) 頭可萬斫 此髻髮不可一削 身可萬戮 此圓袂不可一裂” 27) 千洛龜, 「答朴善明」(壬戌4月25日)『鐵嶽漫筆』(필사본, 不分券)⦁「答朴楊西」(壬戌4月10日). “忠州 陰城 興春江襄高等地 發文陳由姑” “具由通告于忠陰江春襄高等同志” 이 글은 이근원의 문인 千洛龜가 1922년 4월 역시 같은 문인인 朴峻彬(자 善明, 호 楊西)에게 가평 迷源書院(景賢壇)에 화서⦁중암⦁성 재 배향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이 글에서는 금계 문인들을 주축으로 한 것으로 굳이 지 목한 것은 아니지만, 전후 문맥으로 미뤄 예거한 충주⦁음성⦁강릉⦁춘천⦁양양⦁고성 등지는 錦溪 문 인 활동지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