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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 아, 애통하도다. 사천년 화하의 정맥과 이천년 공맹의 대도와 조선조 오백년 예 악전형과 家家 수십세의 관상법도가 여기서 끊어졌도다. 이제 글 읽는 선비는 어 떻게 처신해야 옳겠는가. 선비가 지키는 것은 성왕의 도이니, 선왕의 法服이 아니 면 행하지 않는다. 이제 선왕의 法言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선왕의 法行이 아니 면 행하지를 않는다. 이제 선왕의 법복을 훼손하였으니 이는 그 지키는 바를 잃은 것이다. 그 지키는 것을 잃어버렸으니 어찌 선비가 될 수 있으리오. 이는 천지⦁ 성현⦁선왕⦁父祖에 죄를 짓는 것이니 살아서 장차 어찌 하겠는가. 이제 성토하다 죽고 의거하다 죽으리니, 선왕의 도를 수호하다 죽는 것은 선비의 의리이다. 24) 즉, 전통의복을 서양식 복제로 바꾼 것은 화맥을 비롯해 조선의 정맥과 전통의 고유 습 속까지 모두 일시에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변고를 당한 이상 선비로서의 의미와 역할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擧義해야 한다고 촉 구하였던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생각이 류인석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절규하게 하였다. 땅을 치며 통곡하고 칼을 빼어 스스로 찔러 목의 피를 倭酋 正上馨과 永孝⦁光 範 이하 개화파 역적들의 면상에다 뿌린 자가 몇이나 있었는가. 전국 사민 가운데 痛憤大號하며 의거하여 오랑캐의 무리를 무찌르고 역당을 섬멸시켜 군신사민의 몸에서 양복을 벗겨내고 다시 선왕의 법복을 입히려는 자기 있었는가 없었는가. 25) 곧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감행된 변복령은 유인석을 비롯한 일반 인민들에게 강한 항일적 개심을 숙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 뒤 류인석은 단발령이 내려지자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변복령이 내려진 다음에 이미 단발령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변복령과 단발령을 동일한 맥락 에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또 류인석의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도 더욱 명백하 게 드러난다. 24) 「을미손복시입언」『의암집』권35, 132~133쪽, “嗚呼慟矣 四千年華夏正脈 二千年孔孟大道 本朝五百 年 禮藥典型 家家數十世 冠裳法度 今焉絶矣 讀書爲士者 如何處之爲可也 士之所守 守先正之道也 非先王 之法服 不之服 非先王之法言 不之言 非先王之法行 不之行也 今變先王之法服 是失其守也 失其守 則鳥足 爲士乎 是得罪天地 得罪聖賢 得罪先王 得罪父祖 生將何爲乎” “將死於鼓 御死於轡 守先王之道而死 士之義也 人無有不死 死猶榮於生者 今日之事 有死而巳” 25) 「答朱汝中庸奎書」『昭義新編』권4, 133쪽. “或有幾個擲地痛哭 拔劍自刎 以頸血濺於倭酋井上 馨及泳 孝光範 以下開化黨群逆賊面上者乎 不知八路衆士民中 有能憤疾大號 擧起義旅 掃除夷類 殲滅逆黨 脫其服 於君臣士 身上 而更服先王之法服者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