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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척사운동에는 전국 유림이 참여하였으나 그 가운데서도 특히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존화양이 정신에 더욱 철저하였던 화서학파가 그 선봉에 섰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화서가 올렸던 주전척화 상소를 필두로 개항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최익현의 상소, 김평묵과 류중교의 경기⦁강원도 문인들의 연명상소, 『朝鮮策略』 반입사건이 계기가 된 洪在鶴의 상소 등이 그 가운데 특히 두드러지는 사례이다. 이들은 모두가 화서의 문하에 서 직접 수학한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화서문파의 반제⦁반개화론의 핵심적 내용은 김평묵과 류중교의 문인들이 개항에 반대하여 올린 연명상소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 면, 화서문파의 인물들이 반제⦁반개화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 이유를 해명할 수 있을 것 이다. 이 상소에서는 첫째, 지금의 일본은 과거의 왜와 달라 서양의 앞잡이가 되어 있기 때문 에 곧 倭는 洋과 一體이기 때문에 조선의 원수라는 것이다. 둘째, 일본이 교류하는 서양 은 오랑캐보다도 아래에 위치한 인간의 형상을 한 금수라는 것이다. 셋째, 지금은 개항 문제는 人獸의 문제이므로 華夷의 문제였던 병자호란⦁정묘호란과는 본질이 다르다는 것 이다. 넷째, 일본과 일단 통교하고 난 뒤에는 절대로 그 세력을 물리칠 수 없고, 邪敎인 천주교가 전국에 만연하여 미풍양속이 파괴될 것이다. 다섯째, 일본의 통상요구에 대처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으로는 서양과 결탁한 데 대한 일본의 죄상을 성토하고 그 각성을 촉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지의 저변을 관류하는 정신은 위에서 본 화서학파의 철저한 춘추대의적 존 화양이론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일제의 침략야 욕을 미리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위정척사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6년 1월 일제와의 통상조약은 체결되고 말았으며, 이때부터 국내의 정치⦁경제⦁사회의 제반 상황 은 일제 침략세력이 항상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일제는 1894년에 청일전쟁 도발과 함께 김홍집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조선의 문물제도를 급진적으로 변경하는 갑오경장을 감행하였다. 화서학파의 여러 인물들 은 이러한 갑오경장을 역법 변경(改正朔), 의복제도 변경(易服色), 관제변경(變官制), 그리 고 지방제도 변경(革州郡) 등으로 총괄하고, 이러한 사태를 ‘대변고’로 단정하였다. 그 가 운데 개정된 衣制가 ‘흑색양복’으로 낙착되자, 유생들은 큰 충격을 받아 이를 ‘만고의 대 변고’로 인식하였다가. 變服令에 대한 류인석의 다음과 같이 통탄은 이러한 분위기를 상 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