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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직분인 권사가 되었다. 이 무렵 광주에서 이천 읍내로 이주하였으며, 이천 구역 24개 교 회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구국회 활동 구국의 일념을 견지하던 선생은 서울의 상동교회를 찾아가 기독교에 입문할 때, 전덕 기(全德基, 1875-1914)를 만났다고 한다. 상동교회가 기독교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으로 기능했던 점에서나, 그 중심에 전덕기 목사가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 신앙과 구국 항일투쟁을 일체화했던 선생이 상동교회를 찾고, 그리고 전덕기 목사와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청년회를 조직하여 상동 교회를 민족운동의 최고 요람으로 만든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천 출신이었던 전덕 기와 이전부터 서로 친분관계를 갖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지만, 선생은 교회활동 과 구국투쟁을 일체화시켜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동엡윗청년회와 그 후신인 상동청년회 참여를 통해 그로부터 상당한 지도와 도움을 받았을 개연성은 정황상 크다고 인정된다. 기독교 신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선생은 이천에서 구국회(救國會)라는 애 국단체를 결성하였다. 선생이 구국회를 결성한 시기와 경위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 만 1902년 기독교 신앙을 마음속으로 수용한 직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구국회의 조직, 행동 강령이 아래와 같이 철저히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 입각해 있었던 점으로 보아 그러 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信)은 진실한 신념으로 상제(上帝)를 신봉하고 기독의 교훈으로 죄과를 회개하고 진리 의 삶으로써 완전한 인간의 기초로 삼고자 함이요, 망(望)은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관존민 비(官尊民卑)·의타사상(依他思想)·직업차별·미신허례 등 악풍 폐습을 타파 개선하며 신교육 을 흡수하여 현실만에 낙념(落念) 말고 직업에 충실함이요, 애(愛)는 진정한 애의 정신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을 표어로 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며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며 정의로 단결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는 조국광복의 기초라. 선생이 조직한 구국회는 이처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믿음·소망·사랑 등 세 가지 강령을 실천하여 구국, 곧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앞서 투신했던 의 병투쟁의 한계로 깊은 좌절을 경험했던 선생이 기독교를 수용한 후 선택하게 된 최선의 구국운동이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국권회복운동이었던 것이다. 신앙에 기반을 둔 구국회 의 활동은 이즈음 이천․ 여주․ 광주 일대에서 기독교세가 급격히 팽창함에 따라 더욱 활 발하게 전개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