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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그는 일시를 거쳐 옮겨 류중교 등 고흥류씨 문중의 어린 자손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그 는 일가를 거느리고 포천⦁양주⦁춘천⦁가평 등지를 전전하며 자제들을 가르쳐 생계를 이 어가는 극빈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특히 1856년 그의 나이 37세 때에는 춘천에서 洪在龜 ⦁洪在鶴 형제를 비롯한 청년 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일문을 이루게 되었고 보름마다 강 회를 열기도 하였다. 김평묵은 문하의 류중교와 함께 1867년 先師 화서의 학문 요체를 간결하게 정리한 『華西雅言』을 편집, 간행하였다. 이 책은 강습교재로 활용되어 학파의 경전 역할을 하였고, 나아가 화서문파의 세력 확대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류중교(1821~1893)는 1836년 이항로의 문하에 처음으로 나아갔으며, 1845년 14세 때부 터는 김평묵으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그리하여 류중교는 화서와 동문의 선배였던 김평묵 양인을 일생 동안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 그는 柳重岳⦁류인석 등 춘천 柯亭의 고흥류씨 일족의 대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91년 김평묵 사후에는 화서학파의 수장에 오른 인물이다. 류중교는 1889년 58세 때 류인석을 비롯하여 서상렬⦁鄭華鎔⦁주용규 등의 문인 자제들 을 거느리고 제천 長潭으로 이거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紫陽書社를 열고 1893년 타계할 때까지 문인 양성에 주력하였다. 류중교 문하에서 배출된 류인석⦁류중악⦁이근원⦁이소 응 등이 학파 내에서의 활동면에서나, 나아가 위정척사운동과 연관되어 특히 두드러진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활동지 중심으로 부단한 강학을 통해 일문을 이루어 화서학파의 세 력이 크게 번창하게 되는 중심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이다. 류인석(1842~1915)은 화서로부터, 이상에서 보았던 김평묵과 류중교 등 화서학파의 중 심축을 이루었던 3인을 스승으로 섬겨 화서문파의 학문을 철저하게 계승하였다. 그는 1855년 14살의 나이로 이항로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김평묵과 류중교를 최후까지 따랐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류인석은 화서를 연원으로 하고 그 문하의 걸출한 학자들인 김평묵과 류중교 등의 위로 스승으로 섬겼고, 아래로는 이소응, 서상렬, 이정규, 이조승 등 항일투쟁의 전선에서 함께 분투한 이들을 문하에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서학 파 항일투쟁의 선봉인 동시에 중심에 위치해 있었던 셈이다. 류인석은 류중교 사후에 제천 장담의 자양서사와 그 인맥을 계승하기 위해 1895년 5월 장담 맞은편의 九灘으로 이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에서 講習禮와 鄕飮禮를 주재하 며 화서학파의 구심점으로 탄탄한 인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곧 그는 자양서사의 講長 으로서 그 동안 류중교 문하에서 수학하던 서상렬⦁정화용⦁안승우⦁박정수⦁원용정⦁이 춘영 등을 자신의 문하에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탄탄한 인적 기반을 토대 로 그는 1895년 이래로 1015년 작고할 때까지 20여 년 간에 걸쳐 장기 지속적인 항일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