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page

387 으로써 관서지역 화서학파의 일문을 이루었다. 15) 1846년 이항로의 나이 55세 때에는 崔益鉉(1833~1906)이 13세의 나이로 벽계로 찾아와 수학을 청하였다. 이항로는 총명한 어린 최익현을 특별히 사랑하여 ‘落敬閩直’이라는 네 글자를 내려주면서 학문을 독려하였다. 또한 이듬해 12월에는 그에게 勉菴이란 호를 내려 주었다. 이후 최익현은 1855년 出林 때까지 벽계를 출입하며 학문에 매진하게 된다. 이항 로 문하에 입문할 즈음 최익현은 양근 厚谷(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에 거주하였던 것으 로 알려져 있다. 16) 이와 같이 이항로의 일문은 1840년대에 이르러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임규직⦁이인구⦁ 김평묵⦁류중교⦁박문일⦁최익현 등을 비롯한 유위한 재사들이 운집하게 됨으로써 전국적 인 문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파의 세력을 바탕으로 1860년대 이후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을 침략하는 시대상황에서 이항로의 독특한 학문내용인 공자⦁주자 와 우암을 중심으로 한 춘추대의적 존화양이 사상을 구현하려는 위정척사운동을 폭넓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항로는 1868년 3월 18일 77세를 일기로 벽계에서 타계하였다. 이 무렵, 화서학파는 양평뿐만 아니라 포천⦁춘천⦁가평⦁홍천 등지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일대에 널리 퍼져 상당한 세력을 가진 문파로 성장해 있었다. 이후 화서학파는 김평묵이 류중교와 더불어 先師의 위치와 역할을 대신하며 선도해 나갔다. 김평묵과 류중교 양인은 이항로 문하의 동문이기에 앞서 사제관계에 있었다. 류중교는 14세 무렵부터 13살 연상의 김평묵에게 孟子 등의 經書를 수학하였다. 17) 곧 김평묵은 수 학기에 접어들던 어린 시절부터 류중교의 학문과 사상에 직접적이고도 깊은 영향을 준 인 물이다. 이후 양인은 오랫동안 사제간의 두터운 情誼를 쌓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항로 사후 그 嫡傳을 이어받은 인물은 김평묵이다. 유년기 이래로 류중교의 오랜 학문 지도자이며 연장자인 김평묵이 先師로부터 적전을 승계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임종 직전에 이항로가 류중교에게 ‘나를 섬긴 것처럼 김평묵을 섬기라’는 遺命을 남겼다고 한 점으로도 학파내에서의 김평묵의 확고한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18) 김평묵(1819~1888)은 1842년 24세 때 화서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 뒤 27세 때에는 潛 江으로 일시 거쳐를 옮겨 류중교 등 고흥류씨 문중의 어린 자손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15) 「年譜」『雲西先生文集』부록 권1(성균관대 도서관 소장본). 16) 『勉菴集 3』민족문화추진회, 1978, 7~14쪽 참조. 17) 「年譜」『重菴集』부록 권3, 1140쪽. 18) 黃鉉, 『梅泉野錄』國史編纂委員會, 1955, 89쪽. “及恒老且死 託重敎以事己者事平黙 旣而重敎率諸門人 首事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