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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초기 화서학파의 비중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李寅龜(1809~1896)가 이항로의 문하 에 들어온 것도, 명확치 않지만, 1830년대 초로 짐작된다. 광평대군의 후손인 그는 자를 長汝, 호를 莞爾라 하였으며 원래 서울 태생이었다. 일찍이 梅山 洪直弼(1776~1852)의 문하를 출입 수학하던 그는 이항로 문하에 들어온 이후에도 일생토록 홍직필을 이항로와 함께 스승으로 극진히 섬겼다. 10) 이러한 그가 이항로의 문하에 입문할 즈음으로 추측되는 1833년 8월에 지은 시에서 “지난날이 잘못되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으니, 스물이 넘은 세월 헛되이 보내고 말았구나.” 11) 라고 탄식한 구절이 화서에 대한 학문상 경도의 정 도를 짐작케 한다. 이어 그는 1835년 가을에 가솔을 거느리고 단양으로 거처를 옮겨 필 생 守義로 일관하였다. 한편, 이항로가 문인 양성활동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시기는 그의 나이 45세 때 인 1836년 무렵이다. 곧 그해 가을에 양근현 潛江(혹은 潛湖, 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에 퇴거해 있던 참판 栗里 柳榮五(1777~1863)와 조우한 일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춘천 고흥유씨 副學公派의 門長이었던 류영오는 뒷날 이항로의 高弟가 된 류중교의 조부 이며, 柳麟錫, 柳弘錫의 증조부이다. 그해에 류영오가 일문의 자손들을 데리고 와 이항로 에게 수학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아들 柳龜를 비롯하여 손자 柳重學⦁류중 교, 증손자 류인석⦁유홍석 등이 이항로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됨으로써 이항로 문파는 더 욱 번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12) 포천 출신의 김평묵은 1842년 2월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왔다. 13) 그는 이 무렵 홍직필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기도 하였다. 14) 후술하듯이 이항로 사후 그 嫡傳을 계승하여 문파의 首長에 오른 김평묵은 류중교와 더불어 화서학파를 이끌어간 양대 축이 되었던 인물이다. 1843년에는 평북 泰川의 朴文一(1822~1894)이 蘗溪로 내려와 이항로 밑에서 직접 가르 침을 받았다. 그 뒤 박문일은 태천으로 돌아가 그의 아우 朴文五와 함께 문인들을 양성함 부록 권9, 1005쪽 참조, 10) 「莞爾漫錄 解題」『莞爾漫錄』(성신여대 출판부, 영인본, 4책, 1981), 참조. 11) 「呈蘗溪函丈二首」『莞爾漫錄 元』, “入里氣先肅 知爲賢者居 淸高宜水石 談笑足床書 侵夜冠襟整 登山 杖屨徐 昨非今始覺 虛度二旬餘” 12) 「年譜」『華西集』부록 권9, 1008쪽. 13) 「行狀」(慶賢秀撰)『重菴集』부록 권1, 1091쪽; 「年譜」부록 권3, 1137~1138쪽;「行狀」(洪在龜 撰 ) 『重菴別集』권10, 부록, 208~209쪽. 14) 『梅泉野錄』(국사편찬위원회, 1955)에서는 김평묵이 홍직필의 문하에 있다가 薦擧問題로 실망하고 절 교한뒤 이항로 문하에 들어온 것으로 기술하였다(89쪽). 그러나 김평묵의 연보나 행장에서는 이와는 다 르게 이항로의 문하에 먼저 나아온 것으로 밝히고 있다(「行狀」『重菴集』부록 권1, 1091쪽; 「年譜」 『重菴集』 부록 권3, 1137~113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