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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尊華攘夷思想을 강론받았을 것이다. 뒷날 이항로가 송시열에 대해 절대적으로 경도되는 계기가 된 것은 이우신과의 교유였다고 생각된다. 5) 이상과 같은 관계에서 말한다면, 이항 로는 기호학파에 소속된 노론 계열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약한 사승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항로는 결국 독학으로 일문을 이룬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기호학파의 원조에 해당되는 李珥보다도 주자학에 대한 敎條性, 이단에 대한 黨派性에서 기호학파 가운데서도 그 정도가 가장 격심했던 송시열을 朱子와 함께 최고로 존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항로의 학문은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존화양이론이 최고의 가치규범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항로의 학문이 완숙의 경지에 이른 시기는 그의 나이 30세 전후로 보인다. 곧 29세 되던 해(1820년)에 양근현의 長老들이 講座를 개설하고 이항로를 초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무렵에 그는 이미 양근현에서는 명망 있는 학자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6) 또 김평묵이 지은 이항로의 「事狀」과 崔益鉉이 지은 이항로의 「神道碑銘」에서 그의 나이 30세 되던 무렵에 사방에서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 것도 역시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7) 그리하여 학문이 완숙의 경지에 오른 이항로의 문하에는 사방으로부터 쟁쟁한 청년재사들이 학문 연마를 위해 운집하게 되었다. 8) 화서학파는 이항로가 정열적으로 학문에 매진하던 1820~30년대에, 곧 그의 나이 30~40 대에 큰 틀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의 학문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는 1840년대에는 전국적 인 문파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화서학파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는 인사들 대다수의 입문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는 사실도 그러한 경향을 짐작케 한다. 이 시기 의 이항로의 문하에 운집한 인물들 가운데 학파형성 과정을 염두에 두고 그 두드러진 사 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화서학파가 전국적인 문파로 성장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 로 이러한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다양한 형태로 폭넓은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초기 이항로 문하에 들어온 인물 가운데 두드러진 이가 錦川 任圭直(1811~1853)이다. 그가 이항로를 찾아 벽계로 온 것은 1831년의 일이다. 임규직은 5대조 任守幹이 승정원 右副承旨, 조부 任天常이 홍문관 校理를 지낸 북인대가의 자제였다. 그가 이항로를 찾았 을 때 그의 나이 21세였으며, 이항로의 배려로 벽계에 머물며 수업에 전심할 수 있었다. 9) 5) 姜在疹, 『近代韓國思想史硏究』, 한울, 1983, 59쪽 참조. 6) 「年譜」 『華西集』 부록 권9, 1004쪽. 7) 「華西先生事狀」(金平黙 述) 『華西先生雅言』, “時先生年方三十 四方學者至者甚衆” 崔益鉉, 「華西李先生神道碑銘」, “遠近聞風 翕然尊之 負笈而至者 日盈基門 時先生年 將三十矣” 8) 「行狀」『華西集』 부록 권8, 974쪽, “先生年將三十 四方之士 聞風而至 書舍常不能容” 9) 「錦川任先生行狀」『省齋集』 권45 ; 「金平黙錄二」『華西集』 부록 권2, 語錄, 848쪽, 「年譜」『華 西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