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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성재 류중교의 문하에서는 柳重岳⦁柳麟錫과 더불어 이 근원이 함께 鼎足의 형세로 拔群의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활 동 근거지를 중심으로 부단한 講學을 통해 일문을 이루어 화서학파의 세력을 크게 번창 시킨 중심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 이근원의 학맥은 양평을 중심으로 경기⦁강원⦁충청 3 도 접경 일대에 널리 전파되어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금계는 곧 이 지역 華門의 首長이었던 셈이다. 물론, 화서문파 외에도 양평지역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의병 대열에 참여하고 있었다. 1896년 남한산성의진에 참여하였던 李承龍을 비롯하여 1907~8년간의 후기의병 때 활동 한 李延秊(이승룡의 아들)⦁權得洙⦁金魯洙⦁曺仁煥 등의 의병이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하여 양평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참여자들의 사상적 흐름은 대체적 인 견지에서 볼 때, 화서학파의 학문 사상적 내용에서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여기서는 논외로 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2. 화서학파의 嫡傳 화서 이항로는 1792년 경기도 楊根縣 蘗溪里(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서 부 李 晦章과 모 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光老, 자는 而述이었으며, 본관은 碧珍이 다. 이항로의 학문은 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정립된 것이었다. 원래 이항로는 뚜렷한 師承 관계 없이 ‘獨力으로 평지에서 崛起한 獨學者’로 알려져 있다. 3) 다만 아버지 이회장과 李 友信⦁任魯 정도가 학문 수학기의 이항로에게 일정한 영향을 준 학자들로 지목되는 정도 이다. 이항로는 또 부친의 학통과 연원을 같이하는 金昌協-李縡-任聖周-任魯의 학맥과도 관계 가 있다. 즉, 이회장은 임종주의 문인인 동시에 임종주의 아들인 任魯와 知友였다. 이항 로가 父命에 따라 16세때(1807) 상경하여 任魯를 배알한 것도 이러한 관계하에서이다 4) 성장기의 이항로에게 학문적으로 더욱 가깝게 영향을 미친 인물은 李友信이었다. 이항로 는 21세 때(1812년) 楊根縣 砥平의 재야산림 竹村 李友信을 찾아가 수학을 청하였다. 이 항로는 이때 尤庵 宋時烈과 동일한 연원을 가졌던 이우신으로부터 송시열의 春秋大義的 3) 玄相允, 『朝鮮儒學史』, 玄音社, 1982, 368쪽. 4) 「年譜」 『華西集』 부록 권9, 1002쪽.